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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 -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우리 관점에서 비판한다

연이야 2012. 10. 9. 18:20

이 책은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구성하는 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비유럽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자유와 평등, 인권, 민주주의, 근대 과학, 자본주의 등등의 긍정적 면만을 부각한 유럽중심주의는 비유럽에서 보면 학살, 약탈, 착취의 역사라는 점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보니 일부 서구학자(칼 맑스, 에릭 홉스봄) 비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일부 서구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서는 자의적이고 주관적 면이 보이며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아직까지 학문적 완결성이 불충분하고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미흡한 내용(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원동력, 도시의 역할에 대한 서술은 없음, 왕과 영주, 왕과 시민과의 관계 설정)도 있다. 무엇보다 근대라는 개념, 기준이라는 면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중상주의 시절을 자본주의로 보면서 정치, 사상, 사회적인 면에서 근대 요소는 17, 18세기 이후로 보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 구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으므로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부분은 생략하고 나머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세계사를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을까

서구에서는 19세기에 폰 랑케에 의해 역사학의 객관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가 사료를 가지고 과거의 일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사료를 선별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사관은 개인의 기호, 욕망, 편견, 이데올로기, 소속 집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객관적 역사를 중시했던 랑케역시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권위주의적 국가를 받듦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의 장애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역사학 역시 유럽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이런 유럽중심주의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은 유럽으로서 합리적, 진보적, 과학적 문명을 만들어 왔고 기타 지역은 후진 지역으로 인식시킨다. 그 결과 식민 지배나 불평등은 당연한 결과로 정당화된다.

유럽이 오늘날과 비슷한 지리적 단위로 여긴 것은 16세기이후 종교개혁, 계몽주의 영향이 컸다. 특히 계몽주의는 문화 발전 단계에 따라 유럽을 최고의 문명으로 규정했다. 이런 과정은 유럽중심주의를 낳았다. 유럽중심주의는 타지역보다 유럽이 우월하고 뛰어나다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세계 최초의 산업화와 근대화로 비유럽을 지배함으로써 증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는 유럽 문명이 특수하고 예외적이라는 유럽예외주의와 18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세계를 본 독특한 관점인 오리엔탈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헤겔의 영향이 지대하다. 역사란 자유의 이념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런 역사이해는 자연스럽게 최고 문명인 유럽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헤겔 철학을 바탕으로 유럽중심주의는 고대까지 확장되어서 서양사를 구성한다. 그리스의 인간중심적 문명, 로마의 법과 사유재산권 확립, 중세의 자유 도시, 세속적 고대 문명을 재발견한 르네상스, 개인성의 감각을 가져다 준 종교개혁 그리고 17세기 과학혁명,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세계관을 발전시킨 계몽사상, 근대로의 개혁인 프랑스 혁명, 생산력의 혁신을 가져온 산업혁명 등, 이 모든 사건들은 유럽인의 창의성과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환상

서양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부터 서양사가 시작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이들에 의해 그리스 문명은 독창적이고 인간 중심적 문명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리스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결코 독창적 문명은 아니며 유럽보다는 비잔틴, 이슬람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직접적 후예이다. 그리스 문명과 근대 이전 유럽은 직접적 관계는 없었고 근 천 년 동안 단절되었다. 유럽인들이 그리스문명에 접근하게 된 것은 14, 15세기 부터이며 19세기에 들어와서 폭 넓게 수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예제나 성문화 등과 같은 부정적 요소들은 축소되었고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 문명을 만든 것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아테네의 제한적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는 널리 인식되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예술부분만을 살펴보면 그리스 예술은 사실적 표현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 자연주의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그리스 조각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종교적 조각이며 동물숭배의 흔적도 있다. 또한 사실적 표현은 그리스에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로운 유럽 중세도시라는 신화

서양인들은 중세도시가 자유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한다. 유럽에서 도시가 활기를 띤 것은 11세기에 와서(생산력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상업의 발달이 원인-블로거 본인 첨가)이다. 상업 발달에 따른 결과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왕과 영주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주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이 모여 살았다. 중세의 도시중에서도 플랑드르 지역과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 가장 발달하였고 상업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 지역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시들은 규모도 작았고 행정, 종교,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중세도시들은 길드에 의한 폐쇄체제, 영주에 대한 봉건적 부담이 존재했고 도시생활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반면 아랍권, 중국,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상업적 성격도 강하고 인구의 규모도 유럽보다 훨씬 컸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란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그리스, 로마의 고전고대 문화에 기초해 새로운 근대 문화가 발전한 시기를 일컫는다. 인문주의를 통해 고대의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의 억압을 분쇄, 신분제를 해체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을 만들었고 근대 과학의 기초를 다졌던 시기로 인식된다. 하지만 여전히 중세적 특징도 많이 남아있었다. 자유롭고 개성이 넘치는 근대의 개인도 이 시기에는 드물며 종족, 정파, 가족 등 개인은 집단속의 존재로 많이 여겨졌다. 또한 이 당시 인문주의자는 종교적인 가치에 의해 행동했으며 인문주의는 실용적인 교과목이었지 철학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에서는 스콜라철학을 가르쳤다. 과학역시 여전히 중세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했고 신분제도에 예속되어 있었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여전하였다. 결국 르네상스는 고대와 중세의 절충적 성격을 가지며 진보적 변화가 있었다 해도 반동적 요소와 결합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에 대한 환상은 18, 19 세기의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 진 역사적 신화에 불과하다.

 

아메리카 정복과 유럽의 해외 팽창

15세기부터 유럽에서 대서양을 통한 동방무역이 활성화 된 것은 아시아의 특산품(큰 이익 창출)과 오스만 튀르크의 지중해 지배,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무역 독점 때문이었다. 이중에서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도 유럽인들은 ‘발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화국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발견이라는 의미는 중요해진다. 또 주인없는 땅을 발견했고 이렇게 주장해야 원주민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단에 의해 취득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견, 만남이라는 용어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의 문명의 파괴, 정복,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은폐할 뿐이다.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군대가 승리한 요인은 철제 무기도 있었지만 근본적 원인은 천연두, 홍역, 티푸스 등의 유럽 병원균 때문이었다. 정복 후 이들은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 노동을 강요했고 노예 무역과 금, 은을 착취하였다. 또한 원주민들의 강제 개종과정에서는 학살까지도 감행했다. 금과 은은 아시아 무역에서 결제 수단으로 사용했고 이후 자본 축적의 토대(유럽에서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고 옥수수와 감자 등 많은 작물은 유럽의 식량 자원이 되면서 인구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근대 자연법 형성과 식민주의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자연법사상은 지역과 시대를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자연적 정의나 자연적 법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중세에서는 기독교 철학 안에 자연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6, 17세기에 오면서 종교개혁, 대서양 무역의 활성화 등으로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근대 자연법사상의 기초가 탄생된다. 자연법은 계몽사상의 핵심이고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자본주의적 소유권-블로거 본인 첨가)에 영향을 줬다. 근대 자연법은 식민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서 자극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비토리아는 만민법을 바탕으로 바다, 해안, 항구는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사유재산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거기에 들어갈 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원주민에 대한 정복과 착취는 정당화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