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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사의 예수읽기 - 마가복음 6:14-29 "권력의 속살"

연이야 2013. 1. 29. 14:06

뉴스타파 호외편-2009년 12월 28일, 현병철위원장은 국가인권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용산참사 진정건을 다루지 않고 일방적으로 폐회선언을 하고, 이에 항의하는 위원들에게 “독재했다 해도 좋습니다”라는 궤변으로 뭉갠다. 이에 대해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이명박정부의 가장 큰 인권침해 사건인 용산참사에 대해서, 토건정부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어서, 부담을 가진 권력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현병철이 오명을 무릅쓴 것”이라고 말했다. 현병철은 가장 유력한 장로교회인 명성교회 교인이다. 무수한 예가 있겠지만, 작금 나타난 이 현상만큼 권력과 교회의 관계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오늘 복음말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헤롯왕이 그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헤롯왕이 요한을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온다. 요한이 옥에 갇힌 이유는 헤롯왕이 형제간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챈 일을 비판한 죄다. 이 일로 헤로디아가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헤롯의 생일잔치날에, 헤로디아의 딸이 뇌쇄적인 유혹의 춤을 추었고, 홀딱 빠진 헤롯이 소원을 물었고, 헤로디아의 딸은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라고 하자, 헤로디아가 요한의 머리를 청하라고 사주했고, 소녀가 그대로 청하자, 헤롯은 괴로웠지만, 맹세 때문에 꼼짝 못하고 요한의 목을 베어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다. 

 

복음말씀이 요한의 죽음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식전달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 복음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의 속살이다. 보통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알아서 기게 하는 권력세계의 실체를 여과없이 증언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전혀 알 길이 없는 권력자들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하여 고발 또는 있는 그대로 말함으로써 우리가 권력에 대해 막연히 갖고 있는 기대나 환상을 버리게끔 하는데 목적이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권력의 실상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에 성공주의가 만연한 것도 역시 권력에 대한 동경에 깊이 매몰돼 있어서다. 놀랍게도 한국교회는 권력의 한 자리에 오른 이가 어떻게 그 자리를 감당했는가에 주목하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오른 것만을 추앙한다. 시쳇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실제 권력의 실상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제대로 알면, 또 하나님나라가 지상권력과 비교하여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한다면, 반복음적 성격인 성공주의에 대해서도 미련을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말해놓고도 우습다. 이미 권력과 그 이익에 함몰돼 있는 교회주류들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마가 1:14에 처음 나온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의 모티브였던 요한의 체포언급 이후, 아무 말이 없다가 오늘 본문에서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을 읽으면 한마디로 어이없다. 이스라엘의 전설 요한이 너무도 허무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이유가 권력에 타격을 입히는 거사라든지, 아니면 열사처럼 자기 몸을 장렬하게 바치는 거라든지 하면 서운함이 덜 할텐데, 권력자들이 잔치를 벌이는 와중에 엉뚱한 음모의 화살을 맞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복음저자의 비수가 숨어 있다. 비록 가슴아프게도 요한이 죽은 소식을 전하지만, 그런 사람을 죽인 그 권력의 실체, 즉 권력의 즉흥성, 무가치함, 반민중성을 고발함으로 예수무리가 지향하는 하나님나라 운동과 극적대조를 삼기 위함이다.

 

전설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한 헤롯 일가의 실상을 파헤쳐보자.

권력의 제 일 토대는 정통성 내지는 도덕성이다. 그럼, 헤롯가는 어떤가? 헤롯가의 원조 헤롯1세(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 왕, 헤롯자손과 구별하기 위해 헤롯대왕이라 부름)부터 보자. 유감스럽게도 그는 유대 남쪽 이두매 출신 이방인이다. 그러니 순혈민족주의가 둘째라면 서러울 유대인들의 반발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기원전 37년, 헤롯 1세는 로마군을 앞세워 유대를 장악하여 왕이 되고, 이 과정에서 10만 명을 학살한다. 이민족에다가 제국의 앞잡이, 정통성과 도덕성 시비에서 함량미달인 헤롯이 민심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대규모 토목사업이다. 어쩜, 우리 현실과 이리도 똑같은지 깜짝 놀랐다. 또 헤롯대왕은 권력의 화신이기도 하다. 정략적 이유로 여섯 번 결혼하고, 그 중에 한 왕비와 두 자식, 장모까지 살해한다.(한승훈 저,『혁명을 기도하라』26-27쪽 인용)

 

다음으로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헤롯의 후손들을 살펴보자.

왕으로 나오는 헤롯 안디바, 그의 아내 헤로디아, 또 헤로디아의 첫 남편 모두 아비는 헤롯1세이고 어미만 다르다. 그들이 낳은 자식까지 포함해서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헷갈릴 정도로 근친상간에 가깝다. 한마디로 개족보다. 남녀가 만나는 제일 조건인 사랑은 개똥에 쓸래도 없다. 오직 정략적 야심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헤롯 안디바뿐만 아니라, 다른 헤롯 자손들도 하는 짓이 원조 헤롯대왕과 똑같다. 요한이 헤롯 안디바를 비판한 이유는 그가 헤로디아를 이복동기인 첫 남편과 이혼시키고 자기가 취했다는 것이다. 비판의 근거는 레위기 20장 21절이다. "형수나 제수를 데리고 살면, 이것 또한 역겨운 짓이다" 그러나 율법준수의 의무보다는 권력에 영혼을 뺏긴 왕에게는 하등 소용없는 말이었다. 이들의 DNA는 오직 권력(이에 따르는 부가이익)만이 전부이다. 하늘과 자연과 이웃을 중시하며 내면을 살피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권력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국가권력을 쥔 사람뿐만 아니라 일상의 관계에서도 이 물음은 오늘도 계속된다.

 

▲ 요한은 헤롯왕과 헤로디아를 강하게 비판한다.

 

다음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정신상태는 어떤가? 요즘말로 품격이 어떤가? 헤롯 안디바가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홀딱 빠져서, 또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그리고 맹세하면서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아무리 춤을 잘 춰도 그렇지 어떻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하는가? 매우 의아하다. 실인즉, 살로메는 그냥 춤을 춘 게 아니다. 헤롯을 유혹했다. 그 유혹에 아내의 딸에게까지 흑심을 품고 내뱉는 말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이다. 허덕이는 민중을 구제하는 일에는 그 어떤 고민도 없는 권력자가 오직 자신의 탐욕유지에만 눈을 밝히는 권력의 추한 면이 이 말에 담겨 있다. 복음저자가 이렇게 구중궁궐에서 일어나는 일을 과감히 증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토록 동경하고 두려워 떠는 그 권력의 핵심부에서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판단과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헤롯이 뱉은 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말은 실효성이 있는 말이 아니다. 헤롯은 로마황제의 신하일 뿐이다. 요즘말로 바지사장이다. 나라땅 한 뼘이라도 줄 만한 권세가 없다. 전권은 황제에게 있다. 성경에는 헤롯 안디바를 왕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하게는 1/4 영주(분봉왕)이다. 이를 뻔히 아는 마가저자가 굳이 왕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비꼬는 투로 썼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헤롯 안디바가 아내 헤로디아의 꼬임에 넘어가서 황제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달라고 간청하다가 주후 39년에 쫓겨나고 만다. 왕은 정치적으로 인심을 얻으려고 수많은 구두선을 백성에게 남발했을 것이다. 그 말들을 지켜야 한다는 고민은 한 톨도 하지 않은 인간이, 어이없게도 사석에서 술에 취해서 또 아내의 딸에 대한 흑심에서 한 말은 지키려고 애를 쓴다. 이런 전체 모습 자체가 권력이 하는 일이 얼마나 볼품없고 추악한가를 보여준다. 복음저자는 이 어처구니없는 권력놀음에 요한이 죽는 비극의 소식을 전하는 게 가슴아프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권력의 실상임을 통렬히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죽음을 겪는다는 것을 은연중 시사한다.

 

서두에서 극명한 예를 말했듯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친권력 우경화 현상은 교회본질을 훼손하는 심각한 형태이다. 그 권력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뭉개고, 반민주적인 불의한 권력인데도 맹목적이든지, 침묵하든지 한다. 왜 그런가? 오직 이익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그렇게 입에 떠 올리지만, 정작 요한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당대의 진실에 대해서는 눈이 감겨있다. 지금 현실에 비추어 자신들이 손해 보지 않는, 가장 무난한 교리여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싶을 정도이다.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진리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시신을 거두어 무덤에 안장하는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80년 5월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일으킨 이후, 희생자가 묻힌 망월동묘지에 가는 일이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처럼, 우경화와 이익추구가 대세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진리, 진실, 진가를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세상을 지탱하고, 새 세상을 연다. 이것이 믿음이다. 공감하는 사람에게 하늘의 은총을 빈다.

- 참세상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