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① (이광일 저)

연이야 2013. 2. 3. 17:48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시절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 속에서 김대중, 노무현으로 표상되는 ‘비판적(개혁) 자유주의정치 세력’이 집권이후 노동과 민중의 삶을 유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몰두한 뒤, 이명박 정권이 그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민중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자, 시민단체는 물론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들까지도 또 다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몰아갔다. 이는 대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는 정치와 경제를 외재적으로 분리시키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이분법적 인식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박정희체제에 대해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나 독재를 했기에 비판받아야 하는 평가도 가능하다. 자유주의 세력은 독재를 문제시 했지 자본을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민주주의가 미래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들의 투쟁에 장애로 기능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8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과 100만 명이 넘는 청년실업자의 고통이 설 땅은 없다.

 

이 책은 이런 현실이 아직도 우리 역사와 민중이 박정희체제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왜 30년이 지난 박정희체제를 넘지 못했을까 그 뿌리는 정치와 경제 혹은 통치체제와 민중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자유주의적 발상에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비판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1961년 5·16 쿠데타부터 유신체제의 종말까지 박정희체제를 토대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견지하면서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라는 상부구조가 자본의 축적제제, 따라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에 대한 수탈과 억압체제 그리고 그 필연으로서 민중의 투쟁과 지배계급의 대응 등을 매개로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를 분석 하고 있다.

 

1장 박정희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발상을 넘어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논쟁은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비판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박정희가 된다. 그러면 제대로 된 논쟁을 위해서는 박정희 체제의 시기 구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게 유신 전과 후로 나뉜다. 그 근거는 3공화정이 유신체제보다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3공화국과 유신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분리론’과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와 독재 체제인 정치를 분리시키는 발상이 있다. 하지만 민주적 박정희체제를 공개적 독재인 박정희체제가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경제성장이 반인권 억압의 정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전태일 분신, 동일방직 똥물사건, YH노동조합 사건은 분리론의 모순을 확인해 줄 뿐이다.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의한 비판은 국가, 정치, 민주주의를 사회, 경제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혹은 중립자로 인식하고 있다. 즉 국가를 중립적 조정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런 인식은 사회구성체 전체를 구성하는 제 관계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게 한다. 한편 국가와 시민사회는 상호 밀접하지만 형태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으며 시민사회에서 전개되는 정치들의 시민권은 체제에 순기능을 할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유주의적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적대적 자본의 지양은 이루어질 수 없다.

 

2장 기존 연구 및 평가의 재음미

1. 유신체제의 등장과 몰락에 관한 논의들

박정희체제에 대한 등장 원인에 대한 연구의 중심은 ‘관료권위주의론’과 ‘과대성장국가론’이다. 먼저 관료권위주의론에서 유신의 등장은 국내수요를 목적으로 한 60년대 수입대체산업이 한계에 부딪치자 그 해결을 위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민군기술관료집단 중심의 국가, 국제자본, 국내 대자본의 연합이 수입대체산업에 근거한 기존의 민중연합을 억압, 통제하며 출현시킨 체제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국가의 이해와 관련하여 몇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국가가 단순한 국가운동의 차원을 넘어 자본의 심화를 매개할 만큼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하는 토대와 깊게 결합된 자본의 국가라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재생산을 위해 애초부터 그것에 내재되어 작동하는 국가 역할의 구조적 변화라는 역사적 맥락 위에 있음을 포착하는데 둔하며 이런 점에서 볼 때 관료권위주의화는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역산특수적으로 관철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료권위주의론의 등장 원인을 내적 요인에만 맞추어 분석함으로써 과학기술혁명에 근거한 초국적 자본의 투자전략변화가 심화에 미친 규정력을 과소평가한다.

 

과대성장국가론은 탈식민지국가는 제국주의의 유산으로 인해 아직 분화, 성장되지 못한 약체의 시민사회에 강한 통제 및 지배력을 행사하며 중심의 부르주아, 토착부르주아, 많은 경제적 잉여를 전유하며 그것을 관료주도적 경제발전에 사용하는 자율성을 지닌 국가를 주요 세 계급으로 전제로 한다. 그에 따라 유신의 등장은 사회경제적 이해의 상충과 위기에서 연유한 것이라기 보다는 통제력, 조종력, 정보수집 능력을 아룰러 갖는 행정기구와 과대성장된 기존의 국가기구, 정부최고수반이 자신의 임기연장을 둘러싼 위기에 대한 대응의 결과로 인식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성장 발전, 주도적 자본가계급의 형성 및 계급들의 긴장과 모순, 그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국가의 성격, 위상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현실을 해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실제 모습은 사회경제적,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이한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국가가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유지에 적합하다고 한다면 현실정합성이 없다.

 

이 두가지 이론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측면을 주요 관심영역으로 한다는 측면에서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오히려 탈식민지사회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에서 필연화하는 국가의 역할 강화를 부각시킴으로써 상대적 자율성 이상의 독자적인 행위주체로서의 국가를 실체화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또 박정희체제에 대한 붕괴 원인과 관련해서는 국가조직(지배엘리트) 사이의 갈등과 민중 투쟁에 착목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이분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전자를 직접 요인, 후자를 간접 요인 지목하는 논의도 있다. 하지만 이들 논의들은 박정희 살해 원인이지 박정희체제의 붕괴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권력관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박정희의 죽음은 유신체제의 붕괴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2. 박정희체제의 역사적 공과를 둘러싼 논의들

첫째, 박정희의 정치적 리더십을 찬양하는 평가이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길로 결집시키는데 성공했고 이를 위해서 정치적 억압, 권위주의화는 불가피하다는 함의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간 영웅주의 입장은 사회관계속에서 구성되는 인간의 분열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탈역사화된 소영웅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대중은 엘리트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동원되는 수동적인 객체일 뿐이며 박정희만이 능동적 행위자이며 역사의 주체이다. 따라서 난관에 직면했을 때 해결책은 제2의 박정희와 같은 탁월한 엘리트의 출현뿐이다. 하지만 이 관점은 영웅이 조성한 구조와 상황에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는다.

 

둘째,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독재를 하였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탈과 억압은 사회의 물적 재생산 및 사회관계들의 재생산이라기 보다는 외재적 권위주의 정치권력의 자의적인 권력남용으로 인한 인권침해와 정경유착으로 이해한다. 즉, 억압적 사회구조들은 독재로 상징되는 잘못된 정치가 없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박정희체제의 정치적 억압은 직접적 생산과정 안의 비대칭적 관계들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국가의 권위주의적 개입에 기인하므로 국가의 경제개입 배제 및 시장원리가 보장된다면 문제는 없어진다고 본다. 이후에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1990년 3당 합당, 1997년 DJP연합은 결코 정치적 변질이 아닌 것이 된다.

 

셋째,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거래비용을 낮추고 무역과 시장 확대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국가에 의한 제도혁신의 결과이고 이 과정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연계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선발자본주의국가 역시 산업화 초기에 권위주의적 개입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다음 정치적 민주화를 전진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애초부터 권위주의적 정치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왜 노동자, 농민 등 하층 생산자만 항상 그런 고통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문제를 매개하지 않는 논의는 외견상 아무리 잘 설명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3장 혁명과 쿠데타의 물적 배경 - 1950∼60년대 사회경제적 분화와 삶의 양상

1. 독점자본의 형성과 지배력 강화

전후 한국 경제는 여러 사정상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은 전후 복구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토착권력을 안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냉전체제에 따른 대공 봉쇄 전략의 반영이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대미 종속적 산업구조를 낳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삼백산업의 독점체를 중심으로 여타 우크라드를 지배할 수 있는 자본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국가권력을 매개로한 생산외적 방식에 의한 자본의 집적, 집중에 주목하여 독점자본으로서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외적 이윤추구는 자본주의 일반에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시대에는 더욱 강화되며 나아가 신자유주의시대에도 중요한 기제로 작동된다. 그리고 국가권력이 개입함으로써 관료자본의 성격이 강화되지만 그 과정은 특정 자본에 독점의 질을 부여하여 노동력 지배와 비독점 자본에 대한 통제가능성을 제고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또한 독점자본은 국가권력에 의한 특혜 뿐만 아니라 저곡가에 의한 농민 수탈, 인플레이션에 의한 노동자, 쁘띠부르주아로부터의 가치이전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결국 50년대 관료독점체의 형성은 사회적 생산의 사적소유가 성장,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독점자본주의의 일반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를 위한 기반이 형성, 발전과정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개입이 60년대 경제개발계획과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매개로 본격화됨으로써 지배력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원조감소, 과잉생산시설투자로 인한 불황은 관료독점자본을 위협하는 한편 민중의 생활고를 가중시켰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19혁명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혁명주체의 쁘띠부르주아 성격과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좌절되었다. 미국은 군부의 내포화 공업화전략을 무력화시키고 대외지향적 개방경제체제로의 전환(일본 독점자본의 진출, 베트남 특수라는 물적 기초를 바탕으로 함)를 관철시켰다. 이는 실업자 및 불완전고용자를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막대한 국방비를 충당할 수 있는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을 육성한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한국자본주의는 급속한 성장을 한다. 이런 성장은 50년대의 관료독점자본을 근간으로 60년대 개방경제체제를 경과하면서 국가권력을 매개로 선진 자본주의국가로부터의 자본 유입, 국영기업의 확대 및 민간불하, 통화정책, 신용기구, 조세, 관세규제, 물가 및 임금수준의 가이드라인 등등을 수단으로 한 사적 독점의 강화를 핵심으로 하면서 이들의 유착을 심화시켰다. 이는 독점자본이 주도적이고 지배적인 부분이 됨으로써 독점자본주의단계로 발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내부르주아의 헤게모니 미약과 선진자본주의의 열강에 의한 세계시장 분할 선점 및 그 분업체계에 규정되어 관철된다. 그래서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은 내적인 완결성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종속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된다. 이런 맥락에서 50년대를 독점자본의 형성기로, 5⦁16쿠데타와 한일협정을 계기로 한 6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기로, 유신을 매개로 한 7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지배력이 일반화되는 시기로 본다.

 

2. 계급분화 및 객관적 존재 상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과 세계체제로의 수직적 통합의 가속화는 계급분화와 함께 기층노동대중에게 부담을 이전, 강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동적 과잉인구, 연소 여성노동자 증대, 농민 그 자체로 산업예비군의 일부를 구성하는 잠재적 과잉인구의 상존과 이농으로 인한 도시 노동력 저수지는 노동자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은 노동자계급 창출을 위한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생산자의 분리를 수반한다. 한국에서는 저임금에 기반한 수출정책은 자본가에게 노동력재생산비용의 절감은 상품가치실현 여부의 관건이 되었고 그 부담은 저곡가정책을 통해 농민에게 전가되었고 도시와 농촌의 소득 차이는 심화되었다. 노동자의 임금은 재생산비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농민의 생존조건은 매우 심각하였으며 이는 농촌쁘띠부르주아의 분해를 급속히 촉진시켰다. 한편 농촌쁘띠부르주아는 도시쁘띠부르주아로 전환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영세판매(행상 등의 반프롤레타리아트 포함)에 종사했다. 하지만 사회간접자본의 확대에 따른 전국적 서비스업, 유통산업의 성장, 지속적인 세금공세로 생존조건 확보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처럼 60년대 후반 노동자계급의 급격한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사회 계급분화의 추이는 50년대와 달리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를 반영하며 국가권력의 파시스트화 경향의 객관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