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② (이광일 저)

연이야 2013. 2. 3. 17:51

 

4장 3공화정의 등장 - 정치적 억압의 증대와 헌법질서의 균열

1.5.16쿠데타의 배경과 발달

4.19이후 과도정부는 혁명에 부정적이었고 권력의 공백 상태를 해소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와 혁신세력이 10여명에 그치며 혁명정국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4⦁19의 계승은 민주당 정부에게 넘겨졌지만 분열과 부패, 정부 기관과 국영기업체에 자신들의 당원을 채용함으로써 또 다른 특권 정당으로 인식되었으며 무엇보다 4⦁19혁명의 요구를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에 대중들은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혁명의 탈각은 군부에게는 좋은 기회이며 4.19세력들이 다시 결집하기 어려운 상황 역시 쿠데타의 기회를 제고시키는 요인이었다.

 

미국과 장면정권은 쿠데타를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이 진압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장면 정권에 대한 불신, 새로운 정부를 이끌 정치세력의 부재, 새로운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은 종속국에 대해 패권 유지를 위한 여러 전술 카드를 쥐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그 카드를 적절히 선택하고 조합하여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은 쿠데타에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쿠데타 세력이 반미/용공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 후 내포적 산업화 전략을 수정하고 한일협정의 타결을 통한 개방경제체제를 관철시키며 미국의 하위파트너로 길들였다.

 

2. 6⦁3항재의 좌절, 정치적 반동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3공화정이 유신보다 더 민주적이다는 주장의 정치적 함의를 알기위해서는 4·19와 5·16쿠데타의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 5·16은 4·19혁명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내포화 공업전략, 부정축재자 처벌, 농어촌고리채 정리, 정치깡패 처벌에 의해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동북아지역통합전략, 일본독점자본의 한국진출 욕구, 쿠데타세력의 안정적 정치경제적 기반 확보의 의도를 반영한 한일회담, 한일협정 비준은 군정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되면서 쿠데타세력의 반민족적, 반민주적 성격을 드러냈다. 그러자 4·19의 요구들이 대두되며 긴장과 갈등이 고양되었다. 이런 점에서 6. 3 항쟁의 직접 원인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이지만 5·16세력의 정치적 반동화, 민생고, 부정부패(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4대의혹 사건 등등)를 고려해야만 민정이양 3개월만에 일어난 박정권에 대한 국민적 투쟁과 저항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 및 민주적 요구를 복원시키고자 하는 행보였다.

 

6.3항쟁을 진압한 박정권은 부분적인 민족적 요구조차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민족주의에 근거한 내포적 공업화정책이 후퇴하고 내외독점자본에 기반한 부르주아적 대외개방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고 국가 권력의 공세와 억압이 강화되는 계기였다. 즉 자본의 성장과 지배력 강화는 비대칭적 사회관계에 내재된 권력관계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쿠데타세력이 4.19혁명의 계승을 언급한 것은 쿠데타세력이 정치적으로 힘과 명분이 취약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6.3항쟁 진압이 4.19혁명의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정치적 반동이 강화되면서 유신과는 차별성을 가진다. 그래서 종속적 파시즘으로의 전환은 유신체제로의 전환기를 그 기점으로 삼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처럼 3공화정이 민주주의였다는 주장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주체가 정권, 체제로서의 국가일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다. 이는 4.19혁명의 규정력에 의한 더 많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6.3항쟁의 진압을 통해 차단시키고 공화당의 친위정당화를 통해 정당민주주의를 위축시키고 3선개헌으로 헌법위기를 가중시킨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5장 3공화정과 체제 위기

1. 축적 위기의 현재화, 사회적 긴장과 갈등의 제고

60년대말 70년대초 미국경제 위기의 영향 속에 한국경제는 단순히 선진자본주의에서 발생한 공황이 파급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 자본주의적 공업화에 근거한 최초의 공황이라 할 수 있는 자본축적 위기국면에 들어섰다. 즉 저임금노동에 기반한 수출정책(대외개방 경제체제)은 자본재, 중간재의 해외의존도 심화라는 장애에 부딪히면서 국제수지적자를 확대시켰다. 국제수지 위기는 과잉 및 부실투자, 외자기업의 부실 및 도산과 맞물려 있었고 이는 금융교란의 원인이 되었다. 금융교란은 이외에도 직간접적인 장기설비자금 공급기관으로 변모하여 개발금융기관화된 점도 원인이다.

 

총체적 축적 위기에서 자본가계급은 산업재편, 임금문제 등에 대한 장단기계획을 국가권력에 제안 요구하는 한편 노동조합의 약화 및 노동관계법의 개정 문제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을 불온시하는 사회적 관념과 노동자계급의 의식속에도 이런 관념이 내면화되면서 계급으로서의 의식화를 차단된 것이 가장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투쟁에는 노동자의 절박한 생존권 및 제반 권리투쟁이라는 점에서 높은 참가를 보였다. 하지만 대자본 중심의 대외지향 수출경제체제에서 주요 부담전가대상이었던 농민의 저항은 약했다. 이는 쁘띠부르주아라는 성격도 있지만 한국전쟁, 농지개혁의 경험속에서 농민의 보수화, 5.16이후 국가권력의 통제 및 중농주의 표방에 연유한다. 하지만 중농주의정책도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고 60년대 말 이후에는 고미가, 다수확품종개량에 의한 식량증산정책을 내놓지만 한계를 드러내고 대중동원과 이데올로기 공세(새마을 운동)에 의해 메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은 저항보다는 도시로의 이주를 택한다. 도시쁘띠부르주아는 세금공세에 맞서 세금데모로 대응하고 반프롤레타리아트는 철거 반대 투쟁, 노점상들의 생활보장요구로 맞섰다.

 

2. 71년 대선과 총선, 대중 이반의 확인

71년 대선 결과 박정희는 총투표의 51.2%, 김대중은 43.6%를 획득했고 특히 김대중은 도시에서 52.3%를 획득했다. 이런 투표 동향은 총선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반대자의 증가와 지지기반의 협소화는 박정희 정권에게는 정치적 위협이었다. 이 지점에서 재고해 볼 문제는 유신의 등장은 중산층의 지지로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중산층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의 최대 수혜자의 하나이며 민주를 포기하고 성장을 선택하여 유신의 암묵적 지지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산층의 투표성향을 차별 없이 평가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며 70년대 초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도 않았다. 오히려 양대 선거 전후 의사들의 수련의 파동, 교수들의 대학 자주, 자율성 보장 요구, 언론자유수호 선언, 사법부 파동, 도시쁘띠부르주아인 상가상인들의 조세저항 등등은 중산층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명확하게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3공화정의 지배가 대중적 동의에 기반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는 67년 실시된 대선의 결과 박정희가 많은 표차로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야당후보와 표차이는 영남지역의 몰표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기에 지역몰표를 대중의 동의에 의한 지배라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공화당도 인정했듯이 광범위한 부정선거의 결과이기도 하다.

 

3. 지배이데올로기의 이완 및 균열

지배이데올로기는 생활고에서 오는 대중의 불만 무마,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 정치적 반동화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목표에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파쇼화 과정의 초기에 지배이데올로기는 절충적이고 이질적이지만 파쇼화 과정의 진전과 더불어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산가족의 존재에서 보듯 반공주의는 한게가 있었다. 그래서 성장이데올로기를 반공과 결합시켜 재조직한다. 반공을 위한 성장주의는 총량적 공리주의(인적, 물적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직하느냐)와 경제적 민족주의를 확산시켰다. 그래서 전자는 경제개발계획으로, 후자는 저임금에 기반한 수출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발생한 데탕트의 흐름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이완, 균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장이데올로기도 내외독점자본으로 가치가 이전되는 구조의 정착에 따른 분배의 악화로 현실정합성은 약화되었고 대중의 의구심과 좌절감을 만들었다. 이런 성장이데올로기의 균열은 다른 한편으로 이완되었지만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반공주의를 동반한 파시스트적 억압의 강제가 전면에 대두할 가능성을 제고시키는 것이었다.

 

8장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박정희체제를 평가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장 위에서만 분배, 복지 등의 논의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 결국 이런 논의 구도에서는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성장과 착취, 수탈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지탱될 수 없기에 이런 발상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어떤 세력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정확히 보자면 누군가의 성장과 발전은 다른 누군가의 답보, 지체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절대적 빈곤은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9백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해소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대중에 대한 정치적 배제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 의해 착취당하는가를 사회관계 및 권력관계의 역사특수적 양태를 밝히면 결국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면 정치에 대한 사유는 불가능하고 정치자체는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다.

 

그런데 복잡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노동중심성에 근거해 있는 논의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틀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 논의들’은 박정희체제를 이해하는데 장애를 조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억압과 동의가 아닌 억압 대 동의라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아예 그런 대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적 논의를 넘어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섭’ 정치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의 급진화’가 필요하다. 그동안 통섭을 막고 있는 장애는 갈등들 가운데 어떤 하나를 원인으로 나머지를 결과로 파악하고 이에 근거한 운동의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그래서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론, 실천 작업의 불완전성에 주목하면서 경계를 허물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급진화이다.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의 구분 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구분이 관념적으로 가능한 것이지 실제 그렇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사회관계에 근거한 이론, 실천상의 조합주의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박정희체제를 다루는 논의들이 그것의 비민주성, 반민주성을 다루면서도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다. 사실 박정희체제의 20년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박정희체제 비판세력들의 한계를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박정희체제 그것의 확대재생산으로서의 신자유주의경쟁국가가 강제하는 분절된 삶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 최소한의 역사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