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좌익공산주의-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오세철 편저자)①

연이야 2016. 4. 6. 18:04


1. 독일 공산주의좌파 역사

혁명의 해 : 판네쿡과 유럽 공산주의의 형성, 1917-1919)

맑스주의를 위한 투쟁 : 판네쿡과 러시아 혁명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봄.

그러나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차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스스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위하여 : 브레멘 좌파와 독일 혁명

새로운 조직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그로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노조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맹아적 구조가 생겨남.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건설의 필요성에 따라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창립대회를 한다. 내부구조로 보면 ISD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18년 11월 4일 Kiel(키일)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으로 봉기는 독일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의 주요세력이 된 SPD(독일사민당)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ISD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ISD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ISD는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판네쿡은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 이는 국가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기 때문. 판네쿡은 스스로 자랑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은 전체로서의 계급을 일으키는 평의회 틀 내에서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적극적 소수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 동시에 판네쿡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기구가 아니라는 근거로 평의회에 비판 없이 의존하는 것을 경계. 주요임무는 사회주의를 향한 프롤레타리아의 명확화와 의식의 도구로 봉사해야 함.

브레멘 노동계급 동원 운동은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가 혁명적 기관이 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ISD 주도의 시위 파업과 함께 11월 27일 시작되었다. 그 요구는 ①평의회 체제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확립 ②모든 비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제거 (사회애국주의를 포함한) ③노동자의 즉각적 무장과 부르주아지의 무장해제 ④Bürgerzeitung의 통제를 중앙 평의회로의 이전이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ISD는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로 이름을 바꿨다. 이론사업에 Arbeiter Politik을 보완하기 위하여 독일 전역에 걸쳐 IKD의 견해를 전파할 수 있는 일간 선동지 Der Kommunist(코뮤니스트)를 창간. IKD의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혁명 후 처음 몇 주는 브레멘에서 급진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의회는 일상 업무에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이었지만 혁명 초기 몇 주간 독일 곳곳에서 일어난 평의회와 달리 행동보다는 분위기에 의존.

혁명의 혼란스런 처음 몇 주간 IKD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단결 부족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IKD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 12월 5일 IKD는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그를 지지한다고 발표.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IKD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

공식적으로 KPD(독일공산당)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 스파르타쿠스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IKD는 새로운 당이 모든 공산주의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 IKD는 당 조직의 진정한 기반이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여야 한다고 주장. IKD는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는 공산주의자가 기존 노조연맹에 참여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IKD는 노동자평의회 틀 내에서 생동하는 “단일조직”에 의해 노조기능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다수의 유능한 스파르타쿠스 지역 지도자의 지지를 받았다. 대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 지도부를 대신하여 Paul Levi가 선동의 가능성을 근거로 참여를 정당화. 오토 륄레(Otto Ruhle)는 의회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진정한 임무라는 입장을 재천명. 결국 참여 반대 안이 통과되었다.

KPD의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USPD는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KPD는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가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

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한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KPD가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에 의해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독일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는 되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이 독립파에서 분리할 때 노동자들은 상황을 더 잘 이해했지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회애국주의자와 같이 동일한 전제에 근거한 통찰력과 이해”를 독립파가 가졌다는 사실에 의해, 혁명적 실천과 관련이 없는 “혁명적 애국주의”의 죄를 지었다고 비난했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판네쿡의 실용주의적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전술로만 공격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판네쿡이 계속 강조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평의회의 의식고양 능력을 통하여 모든 형태의 군사력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판네쿡은 당이 조정과 선전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보았지만, 미래의 전략과 행동에 대한 중요한 토론은 평의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노동자는 혁명적 변혁에 필요한 “실천적 통찰력의 통일”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평의회의 새로운 요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위한 판네쿡의 공식은 본질에서 변하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공산주의의 성장은 공산주의 사상의 성장, 권력획득의 의지, 그리고 혁명을 위한 준비의 성장이다.”

1월, 2월 사건의 공동참여에도 불구하고 IKD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융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KPD 창당대회에서 두 집단을 갈라놓은 차이는 베를린에서의 KPD 제1차 전당대회(6월)에서 다시 나타났다. 갈등의 첫 번째 그림자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사망 이후 KPD의 지도자로 내정된 Paul Levi가 브레멘과 함브르그 조직의 규율부족을 공격할 때 드리워졌다. KPD의 패배에 좌파가 책임이 있고 당의 첫 번째 과업은 중앙집권화로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Levi는 보았다. 동시에 Levi는 KPD가 고립을 벗어나는 길은 좌파를 버리고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80만 성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IKD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브르그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IKD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평의회체제가 확립되면 당은 스스로 해소할 책임이 있다는 가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주제는 Levi 와 그들의 차이를 개관한 판네쿡의 계획에 요약되었고 1919년 8월 KPD 제2차 당 대회에서 열띤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 당 대회 이후 레비는 좌익반대파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시작했다. 브레멘, 함브르그, 베를린에 강력한 거점이 있을 뿐 아니라 KPD 지역 지부에 사실상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비는 그 당시 베를린 감옥에 있었지만 Zentrale의 입장의 이론적 정당화를 해온 칼 라덱의 도움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라덱은 볼셰비키의 결단성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중앙집권적인 당 조직의 지지자였다. 레비와 같이 라덱도 KPD가 USPD를 이기므로 그리고 기존 노조운동 내에 활동함으로써 고립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②좌익 공산주의의 대안(1920∼1927)

새로운 유형의 노동계급 조직

-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와 AAUD(독일 노동자총연합)

판네쿡과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서유럽에 특수한 혁명의 개념화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면 독일 좌파 활동가들은 실천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것을 역설했다. 1918∼20년 시기 동안 노동자평의회의 자발적 창출은 당과 노조조직에 대한 반관료주의 대안의 시도 중 한 측면이다.

혁명적 산별노조운동은 전시에 출현, 1918년 11월 이후 급속히 확산되었던 공장위원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거의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이후 이데올로기적 분화과정을 거쳐 생디칼리즘 경향의 FAUD 형성, 하지만 브레멘 좌파의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역할로 전통적인 노동조합과는 구별하여 ‘workers union'이 출현하였다. 그후 1919년 루르탄광 노동자들의 거대한 비공식 파업물결을 통해 대규모로 성장한다. 그리고 AAU라는 이름으로 전국조직을 결성한다. 이는 기존 노조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구성요소, 반혁명세력이 되었다는 전제하에서 자본주의 파괴와 평의회 공화국 건설을 지향하는 공장 내 혁명적 선동을 조장한다. 하지만 판네쿡은 새로운 조직이 오직 직접적인 혁명투쟁 시기에만 관료화 논리를 벗어날 수 있고 사실상 노조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KPD에서 축출된 좌익 반대파에게는 새로운 혁명당의 성격과 건설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3가지 의견 그룹중에서 다수는 레비에 대한 반대투쟁으로 KPD는 소생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판네쿡은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전략적 요구에 기반한 실천적 필연성임을 분명히 했다. 새로운 시대의 특징은 전후 객관적으로 혁명적 성격의 상황이며 대중의 수동성간의 모순이라고 보았다. 운동의 근본적 임무는 행동을 통해 노동계급을 동원함으로써 그 수동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계급 양극화의 시기에 의회주의 전술에 복귀하는 것은 운동을 탈동원화하고 궁극적 패배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헸다.

카프반란을 통해 KPD의 리더쉽은 불확실성에 의해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고 좌익 반대파는 1920년 KAPD를 결성한다. KAPD는 독일 혁명의 주된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의식 발전이라고 보았다. KAPD는 그 의식이 평의회사고 범주를 중심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KAPD는 당이 혁명행동의 직접적 수단이 아니라 사고의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 혁명적 조직화와 행동의 과업은 AAUD에 맡겨졌다.

노조, 의회중심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부르주아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오직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새로운 구조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조직된 전투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계급들에 의해 국가와 자본과 직접적으로 맞섬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입장은 결국 코민테른과 대립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레닌에 대항하는 판네쿡 : 좌익공산주의와 코민테른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좌익공산주의는 코민테른에 배척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 레닌주의 성격 및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판네쿡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은 세계혁명, 비타협적 계급투쟁, 전투적 반의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판네쿡은 서유럽에서 주된 전술적 문제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정당 조직화의 전위주의적 모델이 어떤 점에서 혁명적 발전의 주요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통일된 노동계급의 적극적 이해와 개입이 없는 권력획득 시도는 혁명에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

한편 레닌은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서 공산주의자는 가장 반동적 제도라 할지라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들어가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배워햐 한다고 강조. 그러면서 볼세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 특히 절대적 집중화와 강력한 규율이 부르주아를 이길 수 있는 근본 조건이라고 강조.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에서 판네쿡은 레닌 정책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레닌의 주장에 또 다른 주장으로 맞서는 것보다 진정한 과제라고 보았다. 소련의 정치적 요구가 서구에서 공산주의자 전술을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되고 코민테른은 서유럽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소련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 소련이 잠재적으로 혁명에 대한 반동적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

레닌에 대한 답은 호르터에 의해 전개되었다. 동구 농민은 공동체적 지향을 갖는 반면 서유럽 농민은 노동자를 계급의 적으로 인식하는 개별화 된 소부르주아라는 것이다. 즉, 서구 노동자들은 참호에 둘러싸인 부르주아를 홀로 맞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르터는 의회와 노조참여가 아니라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 전술을 주장. 하지만 서유럽혁명이 늦어진 이유는 판네쿡처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물리력이라고 보았다.

KAPD는 코민테른과 갈등이 심화되고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 러시아 공산주의는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봄.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 된 농민은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 그래서 서구에서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으로 봄. 그리고 7월에는 이런 판단이 현실화 되었다고 봄. 러시아는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이라고 결론.


*글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 연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찌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 혁명 발생, 대중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 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 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 독일사민당 진압(룩셈부르크 암살당함)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이것이 발전해서 국제연맹 산하의 국제노동기구) ->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1920년~1923년 독일 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 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 노동자총연합 AAUD 창립(공장조직의 연대) 오토륄레 주도.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산당 (VKAPD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