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② (최규진 저)

연이야 2015. 9. 1. 14:47

  

3장 당재건운동의 전개

1절 초기 당재건운동

1, 서울상해파

1)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19293월 이동휘, 김규열, 상해파, 엠엘파, 화요파 회담

12월테제를 실천할 주체를 어떻게 만들것인가? 일시적 준비적 주체 기관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조직 김철수가 책임, 지난날의 조선공산당을 PT당으로 볼 수 없다.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는 열성자 대회를 통해 4차 당대회 열어서 당 재건하려 했지만 실패

 

2) 코민테른의 해산 지시

서울상해파의 활동이 장벽에 막히자 1930년 책임일꾼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조직을 좀 더 치밀하고 조직의 기초를 현장에 두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해산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는 조직 유지를 결정하고 김일수를 코민테른에 보냈지만 해산 지시를 받아들이고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조선국내공작위원회의 지도를 받겠다고 결정 김규열은 노동자 농민 속에 당의 토대를 세워야지 스스로를 먼저 조직하는 당건설 방침은 잘못이라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노동자, 농민속에 당의 토대를 세우는 일은 누가 주체가 되어 어떻게 한단 말인가? 12월테제를 처음 받았을 때 사회주의자들의 고민을 그들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3)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 해산 후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를 열었다. 두 조직의 차이는 12월 테제에 9월테제도 영향을 미침 당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고 당건설 책임과 지도권은 중국공산당 조선국내위원회가 맡음 산업별 노조 건설을 목표

 

2. 엠엘파

1)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당재건보다 예비 단계로서 노동자에 대한 정치적 교양을 목적하는 느슷한 조직일 가능성이 높음. 이들은 아래로부터 당건설 노선,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 그룹도 미리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당건설 노선과 어긋남에 따라 해체. 그리고 동지들 사이의 연락기관인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

 

3. 레닌주의 그룹

1) 레닌주의 정치학교

안광천은 레닌주의 그룹의 중심 인물로 이론가였다. 안광천은 레닌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전국적 정치신문 발행을 주장. 공산주의자를 확대하기 위해 지도자 양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만들었다. 안광천은 김원봉과 손 잡고 북경에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이후 레닌주의 정치학교르를 만든다.

 

2)조선공산당강릉공작위원회

(1)공산청년동맹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마치고 국내에 온 활동가들은 곳곳에서 당을 재건하려고 했다. 그 가운데 강릉의 권인갑이 가장 활발했다. 권인갑은 강릉공산청년동맹과 손을 잡고 활동했기 때문이다.

 

4. 콤뮤니스트 그룹

1)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코민테른은 12월테제뿐만 아니라 국제레닌대학,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를 마친 사회주의자른 통해 당재건운동에 개입했고 콤뮤니스트 그룹과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는 그런 배경에서 조직

김단야는 1926년 국제레닌대학에 들어갔고 1929년 조선에 들어 옴 그리고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결성하고 소련 유학생을 중심으로 당재건운동의 거점 확보하려 함. 192912월 조선을 떠남. 19302월 모스크바 도착 9월 상해에 도착

2)콤뮤니스트와 당재건

(1)콤뮤니스트 그룹의 당재건 방침

상해에서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을 받아 콤뮤니스트발간하였고 박헌영이 합류하였다. 콤뮤니스트 그룹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면서 12월테제를 지지하는 지역그룹을 강화하고 서로를 연결시키며 정치와 조직을 통일하여 당을 재건하려 했다.

(2)콤뮤니스트 발간과 배포

김단야, 박헌영 등은 콤뮤니스트를 달마다 내고 상해에서 국경까지 그리고 신의주, 서울에 접선하는 곳을 마련하려 했다. 내용적으로는 당활동 쟁점으로 삼아 조선의 정치, 조직문제, 코민테른의 결정을 다루려고 했다. 이들은 콤뮤니스트 출판, 국내 배포망 형성, 독자반 구성, 노동자 통신망 등을 두어 현장과 정치, 공장과 전국을 연결하여 당을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배포망이 구속되고 모스크바로 돌아오라는 지시에 따라 1934년 모스크바로 복귀

 

2절 이재유그룹의 당재건운동(19331936)

1. 이재유의 운동방침

1)혁명가 이재유

이재유는 1905년 함경남도 삼수군에서 태어났다. 삼수보통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다녔지만 어느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1927년 동경대에서 신인회 가연 노동야학에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192894차 조선공산당 연루자로 검거되어 조선으로 압송 됨. 그는 감옥에서 김삼룡, 이성출, 이현상을 만나고 자본론과 사적유물론을 연구했고 메이데이 기념투쟁과 석공 파업투쟁을 벌이는 혁명운동의 3대 역량 기초를 얻게되었다.

이재유그룹의 운동 시기는 경성트로이카(193212월 출옥부터 19341월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될 때까지), 경성재건그룹(서대문경찰서를 탈출한 19344월부터 19351월까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51월부터 1293612월까지)으로 나뉜다.

2) 정세인식과 과거운동비판

이재유는 혁명정세라고 인식. 하지만 과거의 운동은 공산주의 이론과 관계없는 봉건 파벌성에 깊에 빠졌있었고 그래서 노동자, 농민에 뿌리를 둔 힘 있는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함 이재유는 자본주의는 몰락의 길로 접어 들었고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 내부의 통일, 지방적 통일로부터 높은 단계의 통일과 전국적 통일로 나가야 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고 그것을 사회주의로 밀고나가야 한다고 주장. 이재유는 사회주의 진영이 공산당을 만들어 노동자, 농민 속에서 혁명적 공작을 해야만 일제를 무너뜨리고 계급해방으로 나아가는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 즉 공산당의 필요성을 인정 당을 만들려면 일상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동지를 얻고 그 다음 전국적인 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가

 

4장 혁명론과 대중작업

1계급 대 계급과 혁명

1. 코민테른의 좌선회

19287월 코민테른 6차 대회 - 자본주의 위기 3기론(세계경제 모순이 강력하게 발전하여 자본주의가 전반적 위기에 빠지는 시기)에서는 제국주의 전쟁, 민족해방전쟁, 자본 대 노동자간 계급 전투 발생. 전제는 사회민주주자와 파시스트는 부르주아의 쌍둥이이라는 사회파시즘이다. 그래서 사민주의자들의 본질을 폭로하는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술1계급 대 계급전술을 써서 민족 부르주아를 타격.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는 경제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PT혁명은 불가하며 준비단계가 있어야 함 준비단계에서 소비에트를 기초로 한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 통일전선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을 독자적으로 조직하는 역할에 집중

 

2. 12월테제와 혁명론

코민테른은 192812월에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이하 12월테제) 채택. 조공 재건 방침, 조선혁명론 제시. 조선은 일제 식민통치를 받는 전자본주의 형태가 유지 그래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토지혁명을 이룩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먼저 해야 함. 그러기 위해서 소비에트를 기초로 한 PT와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 정부를 만들어야 함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론은 1905년 레닌이 제시(나중에는 트로츠키입장 수용)한 것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혁명에 성공한 뒤에 사회주의로 가는 디딤돌을 놓는 정부를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라고 함.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과 민족주의 진영과 계급연합을 한다는 1920년 중후반 노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본가와 민족주의자와 손을 잡고 인민공화국을 건설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빼고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

하지만 조선 사회주의자들에 혼란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 사이에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조선의 혁명은 직접PT독재로 갈 것인가, 독립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친 뒤에 PT혁명으로 나가는 2단계 혁명으로 갈 것인가가 관심거리

3. 여러 위원회와 소비에트

당재건운동가들은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를 소비에트 형태로 이룩하려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과정을 밟아서 소비에트를 만들려 했을까? 당재건운동가들은 파업위원회, 공장위원회, 혁명적 공장위원회, 공장대표회의, 실업자위원회 같은 것이 소비에트의 싹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비에트는 혁명의 시기가 되어야만 조직 가능. 하지만 일제의 수사망 앞에서 끝내 현실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절 혁명론과 인민전선

1. 인민전선론 수용

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 - 반파시즘 인민전선(중심 주제),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도 공산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 강화해야 함. , 민족개량주의자가 지도하는 대중적인 반제국주의운동에 적극 참가하고 구체적인 반제국주의적 강령에 입각하여 민족혁명 조직과 민족개량주의 조직이 공동행동을 하도록 노력.

인민전선론은 일본, 중국의 영향 혹은 이강국 등의 유학생을 통해 수용. 그렇다면 인민전선의 실체는 무엇이고 조선의 당재건운동가들은 인민전선을 조선에 어떻게 적용하려 했을까?

1930년대 초반 좌선회에 익숙했던 조선 사회주의자들로서는 코민테른 7차대회 -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급격한 변화였다. 이번에도 많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새로운 노선을 수용했지만 모두가 인민전선론을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이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국전 통일 지도부가 없는 점, 코민테른과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관계가 옛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코민테른 7차대회 -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몇 가지 풀기 힘든 문제도 있었다.

첫째, PT통일전선을 기초로 광범한 반파시즘 인민전선 결성이라고 했을 때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의 관계가 모호 둘째,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 셋째,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호 넷째, 평화를 위한 투쟁과 혁명적 패배주의(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전환) 관계 모호 그렇다면 현실 정치에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PT통일전선은 사라지고 인민전선만 남았다 프로핀테른 해산 인민전선정부는 의회제 민주공화국 권력 형태의 정부로서 노동자투쟁을 가라앉히는 진통제였고 공화정과 일정한 형태의 민주주의 정권만을 위해서 모인 세력을 묶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음 혁명적 패배주의를 완전히 거두어 들임 결국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구별할 수 없음

2. 이재유 그룹의 혁명론과 인민전선

코민테른 7차 대회 승인했지만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정부 수리을 당면 혁명의 중심 강령으로 내걸었다. 눈앞에 닥친 혁명이 사회주의로 전화경향을 가진 민족혁명이며 민족혁명운동에서 공산주의운동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하고 농업혁명과 민족혁명을 PT가 앞장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정부라고 결론을 내림

, 이재유그룹은 인민전선을 반전운동에 활용할 전술로 받아들였고 그 전술은 어디까지나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정부 건설이라는 전략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3. 원산그룹의 혁명론과 인민전선

원산그룹은 처음에는 인민전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지도부를 확대, 개편하면서 전술을 일부 바꾸기 시작했다. 일상투쟁에서 민족부르주아까지도 일제 타도 투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하고 소부르주아, 인텔리겐차, 애국적 민족부르주아 일부까지도 포함한 광범한 인민층을 끌어 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원산그룹은 인민전선을 광범한 통일전선전술로 여겼을 따름이다. 원산그룹은 적색노동조합운동을 계속하였고 대중 봉기를 목적으로 삼는한 소비에트 말고는 다른 조직을 떠올릴 수 없었다.

4. 경성콤그룹의 혁명론과 인민전선

경성콤그룹은 일부가 인민전선을 주장했더라도 노동 소비에트 범주안에 있었다. 박헌영은 인민전선을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을 허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민족주의그룹, 특히 대중이 있는 종교계의 반제, 반전그룹과 공동투쟁강령에 따라 위로부터 통일전선을 하는 방식, 도시 소부르주아 지식인을 중심으로 소부르주아적 대중조직을 만들고 노동 대중조직과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생각

그러나 인민전선의 본질은 노동자 중심성과 계급해방을 해체하고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단순한 논리이다. 경성콤그룹이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를 주장하는 한 인민전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5. 두 노선의 공존

당재건운동가들은 코민테른 7차 대회 노선을 수용했음에도 인민전선과 다르게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를 유지했다 이유는 식민지조선의 혹독한 비합법 상황에서 광범한 동맹을 맺기 어려웠다. 조선 사회주의자들마저 전략이나 전술을 체계적으로 구사할 주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대중봉기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대중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 소비에트도 포기할 수 없었다.

 

3절 대중작업

1장 합법과 비합법

사회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투쟁적 통일전선으로 불렀다.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이란? 민족개량주의자들과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공산당이 노동대중과 농민들, 조직, 미조직 도시빈민, 취업자나 실업자 모두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장과 농촌에 있는 대중을 끌어들이려고 개량주의자나 민족적 개량주의자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지난 경험은 세가지 부분에서 잘못이 있었다

통일전선전술을 실행하는 데서 공산당의 역할을 축소해서는 안되고 각 대중행동속에서 지도력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 착취받는 광범한 대중이나 근로 대중 특히 농민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면서 PT 헤게모니를 좁히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동맹자들이 마음 내켜 하지 않거나 동요하는 경우에는 꼭 그들을 비판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결정적인 투쟁의 길로 그들을 끌고 갈 수 있으며 혁명적 정신을 가진 우리 당과 결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 사회파시즘과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전술은 국제 사회주의운동에 큰 해악을 끼쳤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