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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원효와 지눌, 귀족 중심의 불교 의상과 의천

연이야 2011. 4. 20. 01:13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이었다. 흔히 우리나라의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한다. 이는 삼국시절 각국의 국왕이 직접 나서서 들여왔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이 시기 삼국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체제를 갖추게 된 시점이었다. 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도입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불교는 처음 도입될 때부터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교는 만민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다. 세상사람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불교는 지배층의 불교 그리고 민중의 불교로 이원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가지 불교 사상을 뚜렷하게 대변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인물이 의상(625-702)과 원효(617-686)이었다. 의상과 원효는 모두 귀족(의상은 진골이고 원효는 6두품) 출신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간 삶의 자취와 사상은 달랐다.

 

▲ 의상대사

의상의 핵심 사상은 '일즉일체다즉일'이다. '하나가 모든 것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사상을 현실 속에 가져다 놓으면 왕권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나는 왕이다. 그러므로 왕은 모든 것이다. 많음은 백성이다. 백성은 하나, 즉 왕으로 일체가 된다. 결국 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가 된다. 당연히 왕실에서는 적극 보호하고 권장하면서 의상의 철학은 통일신라시대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 의상의 불교 사상을 잘 드러내 주는 월명사의 <제망매가>는 죽은 누이를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시이다. 이 시는 '아아, 미타찰에 만날 나 / 도 닦아 기다리노라' 하며 끝을 맺는다. 죽은 누이를 극락세계에서 만나기 위해 열심히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는 얘기다.

 

불교의 천국인, 극락세계에 가려면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런데 도를 닦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빠 도 닦을 시간이 없다. 여유 있는 사람, 즉 귀족이나 스님만이 도를 닦을 수 있다.(스님역시 대부분은 귀족이었다) 이렇듯 의상의 불교는 귀족불교이고 왕, 귀족과 평민은 하나이다. 그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존재할 수 없다. 왕 중심의 정치질서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철학이다.

 

 

▲ 원효대사

원효는 이런 사고방식을 배격한다. 있는 건 있는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있는 것은 없어지고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난다. 즉, 있음도 부정되고 없음도 부정된다. 있음과 없음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함께 부정된다. 원효의 철학을 '화쟁 사상'이라 한다. 화는 화합을, 쟁은 다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효의 철학은 '갈등과 조화의 철학'이다. 만물은 하나라는 사상이 현실 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원효의 철학은 그것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귀족과 평민은 대립관계이다. 따라서 갈등이 일어난다. 또한 그 관계 속에 조화도 있다. 즉, 원효는 갈등과 조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갈등을 통해서도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조화를 통해서도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원효는 있음과 없음, 하나와 둘, 귀한 것과 속된 것, 중심과 주변 등 네 가지를 들어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그는 어느 한쪽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데서 다툼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치우침에 대한 경계이다.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 장애가 되는 편견은 무엇이든지 배제해야 한다. 거기에 진리의 길이 있다.

 

원효는 자신의 울타리에 매몰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벗어난 허황한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라는 얘기이다. 도를 닦기 위해 시간을 내고 절에 가고 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깨우침을 얻으라는 말이다. 민중불교의 진수이다. 원효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였다. 그는 귀족적 편견에서 벗어났다. 귀족 신분을 내팽개치고 승복을 벗어던지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어 박춤을 추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렇듯 평민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는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데에는 원효의 교화가 컸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귀족층은 원효를 배척하였다. 100명의 스님을 뽑는 데에도 원효를 제외할 정도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원효의 삶과 사상은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원효는 협소한 생각과 편견 그리고 자신의 신분까지도 벗어던지고 민중과 함께 하고자 했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가 추구하고자 한 것은 '소통과 통합'이었고, 그것을 '갈등과 조화의 통일'로 표현하였다

 

 

 

▲ 의천대사

고려 초기 불교는 수많은 종파들로 난립해 있었다. 신라 때부터 계속해서 지배권을 쥐고 있던 교종은 2개의 종파로 나뉘었다. 신라 중앙정부와 교종의 결탁에 반대해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한 선종은 9개의 종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 종파들은 유력한 귀족 가문들과 손을 잡고 서로 대립하며 자신들의 세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고려 광종 때에 이르러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광종은 안정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광종은 왕실 불교를 중심으로 여러 종파를 통합하는 작업을 하였다. 각 종파들이 귀족들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종파를 통합하여 왕실이 주도함으로써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었다. 이런 종파 통합 시도를 교종과 선종의 통합, 즉 교 / 선 통합 시도라 한다. 결국 교 / 선 통합 시도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일을 본격적으로 담당하고 나선 사람은 광종의 증손자뻘 되는 의천 대사였다. 의천은 문종의 아들로서 왕실 불교를 중흥시키는 데 전력하였다. 그는 신라의 의상이 주장한 '일즉일체다즉일'을 주요 모토로 내걸었다. '하나가 모든 것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여기에서 '하나'는 물론 왕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의천은 자신을 원효의 후계자라고 자처하고 나선다. 경주 분황사까지 찾아가서 <제분황사효성문>을 지었다. "법을 구하는 사문 의천이 해동교주 원효 보살께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의천은 수많은 고승들의 책을 살펴보았지만 원효의 글만한 게 없었다며 원효를 찬양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말씀이 잘못 전해지는 걸 슬퍼하고 지극한 도가 쇠퇴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해, 이름난 산들을 돌아다니며 없어진 책을 구하다가, 경주의 옛 절터에서 살아 계시는듯한 모습을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원효에 대한 애틋한 존경심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원효가 부활하였다. 그런데 부활의 목적이 원효 사상의 실천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였다. 원효는 백성과의 소통을 중시하고, 백성 속에서 살다 간 민중불교의 실천자였다. 그러나 의천이 주목한 것은 이런 사상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원효의 통합론이었다. 원효 당시에도 불교가 여러 종파로 난립하고 있어서, 원효는 종파 통합을 주장하였다. 의천은 이 통합론을 끄집어내어 종파 통합을 주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의천은 종파들을 비판하고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통합 논리로 '교관병수(敎觀幷修)'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교'는 경전 공부를, '관'은 참선을 의미한다. 교종은 경전 공부를 중시하고, 선종은 참선을 중시한다. 의천은 그 둘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 종파로 난립하던 불교계는 의천에 의해 평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고질적 문제의 해결은 아니었다. 집권세력과의 결탁과 그로 인한 타락상은 오히려 더 극심해졌다

 

▲ 지눌 - 성철이 죽이려 했던 돈오점수와 민중불교

불교는 고려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철학적인 영향력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권력에서도 막강하였다. 속세를 떠날 것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속세의 이익을 마음껏 누렸다. 집권세력들과 결탁하여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또한 승병까지 두어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지켰다. 백성들의 고려 정부에 대한 불만과 항거를 억누르는 역할도 하였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고려 전기 문벌귀족들이 몰락하였다. 아울러 이들과 결탁해 있던 불교계의 세력들도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환기에 불교계 내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 선봉장이 지눌이었다.

 

그는 먼저 불교계의 타락상을 질타하였다. 그는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부처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을 한다.

자기 마음이 진정한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면 티끌처럼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깎아 골수를 꺼내고 피를 다 짜내어 경전을 베낀다 하여도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은 헛수고일 뿐이다.

 

극언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놓은 지눌의 뜻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기만 하면. 이것은 절에 찾아가 보시하면서 열심히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요, 그 어려운 불교 경전을 읽으며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얼마든지 일상생활 속에서 도를 닦고 수행을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민중불교적 전통의 부활인 것이다.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문벌귀족들과 결탁해 있던 불교 집단들은 철퇴를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눌은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수선사(修禪社)를 결성하였다. 여기에서 '사(社)'는 절[사(寺)]이 아니다. 단체를 의미한다. 그는 단체 결성 취지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함께 단체를 결성하여 정(定)과 함께 혜(慧)를 익히자. 예불하고 경전 공부를 하고 노동하는 것까지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인연에 따라 본성을 기르고 평생 구속 없이 지내자.

 

여기에서 '정'은 참선을 말한다. '혜'는 경전 공부를 말한다. 지눌 역시 의천처럼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의천이 불교계를 평정하기는 했으나 종파 통합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현실을 반영한다. 여전히 종파 난립이 있었던 것이다. 지눌의 통합 논리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한다. 이 결성 취지문에서 주목할 점은 단체에 모인 사람들이 예불과 경전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노동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 단체가 백성들의 참여 속에서 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체의 문을 널리 개방하여 선종, 교종 등 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물론 유교, 도교를 공부한 사람도 받아들였다.

 

무신정변 이후 새로이 등장한 신흥 지식인들이 지눌의 수선사에 주목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혜심이었다. 혜심은 유교를 공부하여 과거에도 합격했으나 던져버리고 지눌을 찾아가 중이 되었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개경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지눌의 후계자가 되었다. 지눌의 수선사는 혜심으로, 그리고 다시 경한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백성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도를 닦아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불교 사상의 중대한 전환이었다. 이것은 백성과 함께 하는 불교 개혁 운동이었다.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신흥사대부들도 이 운동에 주목하였고, 실제로 일부나마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오면서 지눌이 세워놓았던 기본 정신이 퇴색하였다. 집권세력과 결탁하는 타락상이 계속되었다. 결국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는 호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고, 억불정책으로 인해 크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 돈오점수 vs 돈오돈수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스님의 한 마디가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 것. 이 말이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그것이 조계종의 창시자인 지눌의 핵심 사상인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조'격이신 분을, 그것도 그 분의 핵심 주장을 비판했으니 파장이 작을 리 없었다.

 

그러면 지눌이 말하는 '돈오점수'란 무엇인가. '돈오'란 깨달음이란 말이다. '점수'란 계속 수행하라는 말이다. 즉, 지눌은 깨달은 후에 계속 수행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겨난다. 불교의 최고 경지가 깨달음인데, 깨달은 후에 무슨 수행을 한다는 말인가. 수행은 깨닫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 지눌은 깨달음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불완전한 깨달음이 있고, 완전한 깨달음이 있다는 얘기이다. 불완전하나마 깨달음이 있은 후에 계속 수행을 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이게 지눌이 말한 돈오점수의 내용이다. 지눌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불교 경전 공부를 통해 불완전하나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깨닫는 방법을 경전 공부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가을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며 깔깔대고 웃다가 문득 깨달을 수도 있는 일이다. 원효는 한밤중에 목이 말라 맛있게 마신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문득 깨달았다고 하지 않는가. 불완전하나마 깨닫고 난 후에는 계속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은 절에 틀어 앉아 수도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생활 속의 활동, 사회적 실천을 의미한다. 지눌은 수행에 있어 이타행(利他行),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을 강조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할 것을 주문했듯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행동을 수행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점수는 민중불교적 전통에서 백성과 함께 하는 불교를 세우고자 하는 초지일관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깨우치고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통해 수행하고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철은 왜 이 돈오점수에 대해 몹쓸 나무라고 비판하며 베어버려야 한다고 했을까. 그는 불완전한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거짓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런 거짓 깨달음을 가지고 마치 깨달은 자인 양 행세하는 풍토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 성철의 의도였다. 얘기가 여기서 끝났더라면 특별한 사건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성철은 깨달음이란 일시에 단번에 온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고 단번에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사상을 요약한 말이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지눌의 돈오점수와 대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지만, 기실 성철에게 있어 '돈수'는 큰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다. 그는 수행이 가지는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 포인트는 오로지 '돈오', 즉 단번에 깨닫는 것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단번에 깨달을 수 있는가. 성철은 화두를 붙잡고 참선하며 정진, 또 정진하라고 한다. 열심히 정진한 결과, 자신이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는 어찌 알 수 있는가. 성철은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평상시에 한결 같은 경지에 있어야 하고, 꿈속에서도 한결 같은 경지에 있어야 하며, 꿈마저 없는 숙면 상태에서도 한결 같은 경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 백성들이 깨달을 수 있는 길은 사라져 버렸다. 깊고 깊은 산 속 절간에 틀어 앉아 화두라는 걸 부여잡고 며칠이 될지, 몇 년이 될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기나긴 세월 동안 면벽수도를 하는 것 이외에 깨달음의 길은 없다. 불교는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어진 '산중 불교'가 되어 버린다.

 

돈오점수 비판은 결국 지눌이 가진 백성과 함께 하는 불교, 민중불교의 사상을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에 억압 정책으로 불교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불교 사상의 정체 또는 후퇴를 말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과 개혁을 통해 사상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미흡했음을 함께 지적하여야 한다. 여기에 지눌의 철학을 되돌아보게 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레디앙 홍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