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맑스주의 역사 강의(한형식 저)①

연이야 2012. 1. 30. 22:04

  이 책은 새움에서 진행되어 온 맑스 직전의 사회주의에서부터 현재까지 맑스주의 흐름을 개괄할 목적으로 한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서두에서 용어의 개념 정리부터 아시아 공산주의까지 흐름을 현실의 실천속에서 일어난 쟁점을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반대로 부의 사회적 소유라는 의미가 강하며 다양한 주장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공산주의는 원래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다가 프랑스 혁명이후 정치적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점에서는 일치하며 공산주의에 비해 사회주의는 훨씬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구분하고 추후 소련에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사회주의,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로 부른다. 한편 진보는 생산력의 발전, 거기에 상응하는 정치/문화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런점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진보를 옹호하지만 진보, 보수의 틀로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소련 붕괴후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1강에서는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를 다루고 있다. 우선 정치 노선의 사회주의(바뵈프, 블랑키)는 소수 특히 지식인이 주체가 된 무장봉기를 통한 정치권력 장악, 부의 평등 분배 실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때 대중은 빈곤 때문에 혁명의지지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블랑키는 권력 장악 후에도 소수의 혁명 독재 기간이라는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독재라는 용어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독재(dictatorship)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동안의 권력사용이라는 의미가 어원에 있고 일반적으로 지배(rule)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정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세력인 정치 체제이다. 하지만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민주주의의 부정처럼 보이면서 공산주의는 독재 옹호,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옹호로 왜곡 사용되었다. 그리고 경제 노선으로서의 사회주의(생시몽, 푸리에, 프루동, 바쿠닌)가 있다. 생시몽은 산업을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정치를 경제로 환원해야 된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는 정치가 소멸하고 사물에 대한 인간 관리만 남게되며 결국 국가는 소멸된다. 정념을 조정 노동이 즐거움이 된다. 즉 노동과 쾌락의 일치가 팔랑스테르의 핵심 원리이다. 참고로 맑스 공산주의사회에서 노동은 자아 실현의 방식이므로 고통이 없다고 주장한다.

 

2강 맑스‧엥겔스 초기 사상

○ ‘188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 - 자본주의와 소외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는 맑스의 초기 사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텍스트이다. 이때는 초기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공산주의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이다. 철학적으로 포이어바흐에 의거해 헤겔 변증법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단계이며 경제학 현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였다.

  이 책에서 설명하려던 경제 현상은 사적 소유, 상품생산이다. 맑스는 이 현상들을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석한다. 노동 소외는 노동 결과물로부터 소외,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동의 소외가 일어나는 것은 노동 산물이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의 즐거움, 필요나 욕구 충족의 목적이 아닌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자와 노동산물이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 소외는 인간 소외를 낳는다(자본가와 노동자, 노동자간, 인간 대 자연) 그런데 이 텍스트에서는 사적 소유, 상품 생산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소외를 낳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즉 소외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원인이면서 결과라고 본 것이다.

―변증법 : 혁명적 변화의 철학적 원리 p61∼

  아무튼 자본주의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변증법(특히 부정의 부정)에 주목한다. 변증법은 한 사물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보는데 예를 들면 봉건제는 봉건제이면서도 그 안에 봉건제가 아닌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과정을 거쳐야 자본제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런 변증법은 19세기 급진적 독일 사상가들에게는 기존의 체제가 다른 체제로 바뀌는 변화가능성을 설명하는 논리로 여겨졌다. 즉 변증법의 부정의 부정은 현 상황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유적 본질과 소외의 극복 p63∼(인간 유적 본질의 한계)

  맑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의 소외인데 자본의 기원은 노동에 있는데 자본이 그 기원인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소외되지 않는 원형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원형으로서 인간의 본질을 유물론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인간의 유적 본질(인간은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계몽주의적 인간관)’이라는 관념론적 개념을 제시한다. 따라서 소외는 사회적 과정이지만 인간의 주체적 측면에서 나타나고 해결된다. 그렇게 되니까 사회적 문제를 객관적 토대의 차원이 아니라 주체적 실천의 차원에서 대응하는 논리가 후대에 파생되기도 한다.

 

○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 ‘독일 이데올로기’ - 유물론적 역사 이해 p65∼(‘188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와 차이점, 목적론적 역사관 지양으로써 공산주의)

  그 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앞의 관념적 인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독일이데올로기’에서는 역사철학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텍스트이다. 소유 형태의 변화가 인류 역사의 변화 원동력이라고 인식하는 유물론적 역사 이해를 한다. 역사의 과정은 역사의 끝에 도달하게 될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목적론적 역사관(기독교, 헤겔의 역사철학)을 지양하고 공산주의 사회는 구체적 모습이 완결된 형태로 있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역사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운동의 결과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또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자립적 영역이 아니라고 표명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생겨나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형태의 문제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여기에서 토대에 의해서 상부구조가 결정된다는 핵심 테제가 정식화 된다.

 

○ ‘공산당 선언’ -맑스주의 기초 확립

  ‘공산당 선언’은 1880년대 독일 사민당을 통해 맑스주의 세력이 커가고 이후 유럽 각국에서 사민당이 생기고 이들이 모여서 제2인터내셔널을 조직하고 이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끈 세력이 독일 사민당이고 이때 강령이 ‘에르푸르트 강령’인데 이는 ‘공산당 선언’에서 유래되었기에 공산당 선언이 중요하다.

 

-유물론적인 자본주의 분석 p74∼(유물론적인 자본주의 분석의 의의)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나 미국 ‘독립선언서’들은 보편적인 권리의 토대를 확립해 놓고 거기서 연역해 가지만 공산당 선언은 계급투쟁의 구체적 역사에서 출발해 사회, 정치, 경제를 논의한다. 즉, 토대를 중심으로 유물론적 역사 해석에 근거해서 저술하였다. 사회 문제를 윤리적인 문제나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고 경제 구조의 문제로 봤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착취/ 억압은 우연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필연적이다. 국가의 역할은 계급 지배의 수단일 뿐이라고 본다.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붕괴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하고 이는 생산의 사회화를 촉진시키며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한 모순은 주기적 공황과 구조적 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며 결국 회복할 수 없는 위기로 붕괴된다는 것이다.(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 이 시점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다수를 차지하고 대중의 빈곤은 심화되고 이 빈곤화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식의 고양을 경험하고 혁명의 주체로 형성되면서 정치권력을 장악 후 사회주의 조치를 실행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전망 p79∼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의해서 무계급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면 국가는 폐지된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이 때문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페지하지만 사회적 생산물을 취득할 힘을 누구로부터도 빼앗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더 풍요로운 생산물의 취득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현재의 지적재산권같은 경우는 특정 소수의 독점으로 소유에 제한적이다. 또한 공산주의 이념으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제시한다. 특정 소수의 소유권 독점으로 인한 소외와 극심한 빈부격차는 사라지고 만인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이 되고 개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이 됨으로써 개인은 오히려 훨씬 자유로워진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개인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사회적 관계의 앙상불로서의 새로운 인간이 구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본주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동시에 우리의 삶의 방식과 존재조건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

 

3강 맑스‧엥겔스의 후기 사상

○ 착취의 과학적 해명 : 잉여가치론 p85∼

  맑스는 고전파와 다른 사회주의 사상가와 결정적 차이가 유물론적 역사이해, 잉여가치론이라고 강조한다. 맑스는 노동력과 노동이라는 개념의 구분을 통해 이윤의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노동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잉여가치이다. 잉여가치는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이며 그래서 자본주의 착취는 구조적/필연적이다. 즉 자본주의 문제는 분배가 아니라 생산에서 발생된다.

 

○제1인터내셔널 ; 국가주의⦁아나키즘과의 대결 p89∼

  그리고 이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노동자들이 결합해서 제1인터내셔널이 결성된다. 노동 계급의 해방은 노동 계급 스스로의 과제(공산당 선언에는 없는 그 당시에는 혁신적인 주장)이고 노동 계급의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제1인터내셔널에서는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이 대립하였다. 맑스주의에서는 국가 권력을 장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과도기를 설정하였고 의회를 정치수단으로 사용하였다면 아나키즘은 국가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비판, 의회를 정치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국가주의는 독일의 라살레가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라살레에게 국가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어느 편도 아닌 중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협동조합이 국가의 원조를 받아 자본가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사들여서 경제체제를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는 의회전술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국가주의적이지만 국가를 계급지배의 수단으로 보고 궁극적으로 폐지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아나키즘적이다.

 

○ 파리코뮨과 새로운 국가론 : ‘프랑스 내전’ p97∼

  ‘프랑스 내전’에서는 ‘공산당 선언’에서는 없는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기성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즉 기존의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난 후에 그것의 성격이나 내용을 변화시켜야만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 맑스가 주목했던 파리코뮨의 특징은 상비군을 무장인민으로 대체하자는 주장, 행정부와 입법부 통합, 소환권을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인민들의 발의권, 교회 재산 몰수, 선거를 통한 사법 공무원 선출, 노동자 보호입법, 노동자의 직접 경영, 모든 행정의 공개와 민주적 절차, 여성들의 적극 참여 등이다. 아무튼 파리코뮨은 새로운 정치형태로 이런 특징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의미한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에 대한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기존 국가권력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형태가 모색되는 사회주의로 가는 정치적 이행기를 의미한다.

 

○‘고타강령 초안 비판’ - 라살레파와의 대결 p104∼

  독일 사회민주당은 라살레파와 아이제나흐파의 통합으로 만들어졌다. 통합 후 당의 강령이 고타강령이다. 맑스는 라살레파의 입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이 강령의 초안을 보고 독일 사민당 지도자들에게 비판의 편지를 보내고 20년 후 출판된 것이 ‘고타강령 초안 비판’이다. 즉 국가주의 라살레파를 비판하였다.

 

-노동전수익권 비판 p107∼(맑스 잉여가치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의의)

  노동의 수익이 평등하게 모든 사회 성원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노동전수익권을 맑스는 비판한다. 프루동은 노동없이 착취하는 기생적 계급으로 고리대업자나 상인을 들고 있는데 그 이유를 불평등한 교환에 있다고 봤다. 그래서 공평한 등가교환을 실현하면 문제가 없어진다고 봤다. 노동전수익권도 마찬가지로 노동 산물이 노동자에게 온전히 귀속되지 못한 것을 유통, 분배문제로 본다. 이에 맑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있으며 생산수단의 재생산과 불가피하게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서도 잉여노동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에 비판했다.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 p109∼(경쟁과 평등 어느 것이 더 획일적인가)

  맑스는 평등에는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이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며 그것의 경제학적 버전이 상품의 등가교환이다. 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착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평등하지 않다고 봤다. 즉 자본주의는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불평등의 체제였다. 그런데 고타강령은 평등한 권리라는 것이 형식적이고 추상적 원리여서 현실을 평등하게 만드는 데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오랜 기간 자본주의를 거쳐 왔기 때문에 곧바로 완전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렵고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거쳐서 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다는 불평등한 원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완전한 평등은 실질적으로 불평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는 각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이 원칙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 노동의 성격이 변해 노동이 자기실현이나 즐거움의 원천되어야 하고 둘째 개인, 집단 간의 능력의 격차가 여러 세대에 걸쳐 재생산되거나 고착되면 안된다. 마지막으로 능력의 정도와 분배의 기준이 되는 획일적인 척도 자체가 없어져야 된다. 왜냐하면 경쟁은 단 하나의 기준만 존재하므로 평등보다 더 획일적이기 때문이다.

 

-철의 임금법칙 비판 p112∼

  철의 임금법칙이란 노동자계급이 투쟁을 통해 임금을 상승시키면 노동자 인구수가 늘어나고 인구가 늘어나면 노동력의 공급이 늘어나니까 임금이 다시 하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살레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투쟁을 할 필요가 없이 협동조합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즉 라살레는 생산과정의 모순의 결과로 나타난 분배의 왜곡과 빈곤을 본질적인 것으로 속류 사회주의 입장이다.

 

○맑스 사상의 체계화 : ‘반뒤링’,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p115∼

  ‘반뒤링’은 독일 사민당의 오이겐 뒤링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으로 최초로 대중적인 맑스주의 교과서 역할을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거대한 이론적 체계라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뒤링을 비판하다 보니까 엥겔스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체계적 서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나오고 이 책 역시 교과서의 역할을 한다.

 

  엥겔스의 말년 텍스트들은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정전역할을 하는데 특히 카우츠키는 하나의 강령 체계로서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이단과 정통을 심판한다. 비슷한 시기에 플레하노프도 이 텍스트에 영향을 받고 그의 제자가 레닌이고 레닌의 공식 계승자는 스탈린이다. 그래서 ‘엥겔스→카우츠키/플레하노프→레닌→스탈린’이라는 계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맑스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스탈린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초기에는 비슷했지만 말년에는 엥겔스가 맑스 사상을 체계화해서 왜곡시킨 것을 스탈린이 이어받아 스탈린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봤다. 서유럽의 좌익공산주의, 웨스턴 맑시즘의 일부에서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데 문헌학적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반뒤링’, ‘자연변증법’은 맑스도 다 알고 있었고 논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엥겔스의 맑스주의의 체계화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맑스주의가 체계화되었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 사회의 역사를 동시에 지배하는 하나의 법칙을 맑스주의가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자연의 영역은 필연성의 영역이고 인간 사회는 자유의 영역인데 자유와 필연의 두 영역이 하나로 묶이면 인간 사회도 동일한 하나의 원리가 지배하는 필연의 영역이 되어 버리고 결국 인간의 주체적 실천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루카치는 엥겔스를 비판한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상을 대중에게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저술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고 반대되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텍스트상의 근거들도 있다. 이런 점에서 엥겔스에 대한 비판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편파적인 면이 있다고 보는게 객관적 평가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자들 다수가 체계로서의 변증법, 경제환원론, 역사적 결정론, 기계적 필연성으로서의 과학관과 이 모든 것에 근거한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에 대한 예언으로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