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세속의 철학자들 ②

연이야 2011. 11. 22. 01:56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를 언급하려면 그의 평생의 동지 엥겔스를 언급 하지 않을 수 없다. 엥겔스는 방직공장의 아들로서 20개 언어를 할 수 있고 신중하면서도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브레멘, 맨체스터 노동계급의 현실을 보면서 기존 경제학자의 한계를 인식하고 공산주의에 눈을 띄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변호사의 아들로서 과묵하고 신중하였다. 그리고 대학에서 헤겔 철학(모든 관념은 반대의 힘을 잉태하고 이 둘은 통합되고 다시 자체 모순을 낳는다. 즉, 삶은 변화 그 자체이다.)에 심취하여 청년헤겔파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합작품 공산당선언은 공산혁명은 필연적이라는 역사철학을 담고 있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 토대에 조응하여 상부구조가 형성된다고 봤다. 변증법은 모든 사물은 상호작용하고 그 결과 변화를 한다(양질의 전환, 대립물의 투쟁과 모순, 부정의 부정) 유물론은 관념보다 물질이 선행된다고 보고 사회, 물리적 환경에 기초를 둔다. 관념은 환경의 산물이지만 세상의 원리인 변화를 염두에 둔 관념이다. 즉, 관념이 단지 경제 활동의 단순한 부속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변증법에 바탕을 둔 변화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만 스스로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직접 발견되고 주어지는 환경속에서 역사를 만든다’고 하였다. 생산조직, 기술 능력의 변화는 생산의 사회관계를 변화시킨다. 즉, 토대의 변화는 새로운 계급을 낳고 사회의 변화는 단순한 제도의 바뀜이 아니라 계급대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회적 부의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역시 혁명의 필연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생산은 더욱 더 상호의존적, 통합적, 사회적인 반면 사적 소유의 개인주의와 충돌은 공황, 프롤레타리아 양성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운동을 조직하였고 변증법적유물론을 확립하였지만 그의 위대성은 ‘자본론’이다. 도덕적 고려를 배제하고 이성적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자본주의 내적 운동 법칙 발견이 목적이다. 그래서 가장 순수하고 결점(독점, 노조, 특권)이 제거된 상상의 자본주의를 상정하였다. 노동력 가치의 대가인 임금과 노동자들이 가져가지 못하는 잉여가치(이중 일부가 이윤)를 주장한다. 이윤 경쟁은 기계도입으로 실업증가, 임금하락 그리고 평균이윤율 저하로 더 많은 기계 투입은 또다시 실업의 증가로 공황이 발생하고 공황은 자본주의를 갱신하고 이 과정을 통하여 독점자본의 대규모 착취로 자본주의의 붕괴를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의 한계는 가치가 가격에 적용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하였고 독점/과학기술 발달한 상황에서도 잉여가치를 적용할 수 있느냐 문제, 사회 정치적 문화의 역할 간과한 점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

국익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보호관세의 보호아래서 사적 탐욕의 합리화를 비판하였다.

헨리 조지

부자들의 소득은 유리한 위치의 토지를 소유한 행운이고 지대의 불공평함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윤과 임금을 빼앗기 때문에 단일한 토지중과세로 지대를 세금으로 거둘 것을 주장하였다.

존 앳킨슨 홉슨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 필연적이고 이에따라 전쟁은 불가피. 소득의 불평등은 과잉 생산에 빠지고 그 결과 부자들은 저축, 그리고 국내의 과잉 생산으로 인해 해외에 투자, 이것이 곧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간 경쟁은 전쟁의 결과를 발생한다.

 

소스타인 번드 베블런

19세기에서 20세기초 미국에서는 돈을 벌기 위한 상류층의 투쟁은 상상이상으로 냉혹하고 무자비하였다. 이 시기에 상류층의 사기로 돈을 버는 행위는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미국 주류 경제학은 이런 현상을 정확하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노르웨이 이민자 가족으로서 체제부적응자였으며 비타협적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직업을 찾지 못하다 35세때 시카고대 교수로 취업을 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 있었다. 유한계급론은 유한 계급의 과시적 소비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경제적 인간의 본질,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었기에 유한 계급 집단을 만들어내는가, 여가의 경제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한 계급의 일은 모두 약탈을 목적(강제 혹은 술수로 부를 탈취, 땀/기술을 사용 부를 직접 생산하지 않음)하고 이들의 행위는 사회의 승인하에 이루어지고 그 사회는 비생산 계급을 감당할 정도로 부유하고 대단히 공격적이다. 그결과 강제로 부를 탈취하는 유한계급은 명예롭고 위엄까지 있지만 순수노동은 비천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한 계급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과시적 소비를 한다.

베블런의 경제사적 의의는 주류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에 대한 반박이라는 점이다. 합리적 인간이란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정보를 동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베블런의 유한 계급의 과시적 소비는 주류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간론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

호경기와 불경기는 현재의 소득에 의해 측정된다. 그런면에서 경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은 한사람이 쓴 돈이 다른 사람의 수입으로 받아지는 과정을 통한다. 하지만 소득중 일부는 시장을 통해 타인의 소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즉 저축이 전부 투자되지 않는다(이유는 과잉/투자는 기업이 확장시에만 일어난다) 이로 인해 부도의 증가, 실업의 증가로 경기는 침체에 빠진다. 저축과 투자의 불일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대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관습과 권위의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제체제가 오랜 경기침체에 머무는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즉, 저축의 증가는 금리의 하락 투자의 증가로 경기침체를 벗어나지만 대공황때는 작동하지 않는다.

불황시에는 저축이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감소한다. 그결과 투자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부지출의 증가는 투자를 회복시키다.

 

슘페터

순환적 흐름 속에서 재생산하는 정태적 자본주의에서 지주, 노동자는 그들의 몫을 분배받지만 자본가는 이윤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축적이 없고 정태적이고 변화도 부의 확장도 없는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의 기회가 없다. 그렇다면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윤은 기술/조직의 혁신(새로운 기술에 의한 신제품 등등)이 정태적 순환의 흐름 속에 도입되면서 혁신적이지 못한 기업과의 비용의 차액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혁신은 혁신기업가에게서 다른 기업가에게로 혁신의 흐름이 이어진다. 즉, 모방으로 인해 이윤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다. 경기순환도 혁신에 이은 모방의 시기가 바로 호황기이며 격차우위가 사라지는 시기가 바로 불황기이다. 여기서 슘페터는 혁신가를 기업가로 불렀다. 즉 기업가와 그들의 혁신이 이윤의 원천이다. 그런데 30년대 대공황 시기에는 기업가의 혁신이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불황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초단기 불황, 7∼11년주기의 불황, 50년주기의 불황 이 세가지가 한꺼번에 도래하였고 러시아 혁명과 무능력한 정부정책 등 외부요소로 확신에 대한 자신감 결여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체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창조하는 문명의 가치, 장점에 대한 확신이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며 계속 자기혁신적 성장을 하지만 인간성, 성격, 관료적 관리는 혁신을 제도화 관행으로 정착시킨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 합리성에 오염, 확신을 상실 자본주의는 붕괴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곧 망한다는 좌파, 적절한 정부지출이 문제를 영원히 교정할 것으로 믿는 중간파, 노예의 길을 향하고 있다는 우파의 예감을 한 순간에 부끄럽게 만들었다. 슘페터의 논리 전개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를 정태적이고 활력, 변화가 없는 순환적 흐름이면서 동시에 창조적 파괴의 질풍노도인 체제로 보고 있다. 이는 기업가의 혁신 그리고 기업가란 특정계급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혁신 능력을 보유한 사람(모든 계급에서 파견)이기에 가능하다. 즉 자본주의 발전은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다기 보다는 비자본가인 엘리트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