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읽기자료-이슈분석

케인즈

연이야 2012. 2. 28. 22:57

 

시대적 배경 - 대공황

 1차대전이후 유럽은 미국의 경제적 지원으로 점차 경제가 복구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혼란에 빠지면서 전세계로 그 효과는 파급되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고도화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그 생산량이 과잉상태에 이르러 경제는 균형상태를 이탈하게 되었으며 결국 대공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미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에 투자한 자본을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그 영향이 세계각국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각국은 자신들의 수요확대를 위해 경제 블럭을 형성하고 보호무역주의로 일관하여 세계적인 무역, 경제전쟁의 불꽃이 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대공황은 수천만명에 달하는 실업자와 공업생산력의 저하, 무역감소를 낳았으며, 농산물가격의 폭락, 금본위제 정지사태를 불렀다. 미국의 경우, 1923년 부터 25년의 평균지수를 100이라 할 때 1933년에는 공업60, 건축14, 고용61, 임금38 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실업자는 1930년 3,000,000여멍, 1933년에는 15,000,000여명으로 늘어났다. GNP는 1929년 870억$에서 1930년에는 755억$, 1931년에는 590억 달러로 줄었다. 세계공업생산은 1925년을 100으로 할 때 1932년에는 65.9를 기록했고 세계무역량은 무려 70.8%나 감소 했으며 실업자는 50,000,000명을 넘어섰다.

 

유효수요이론

 이러한 공황은 자본주의 경제의 독특한 현상이다. 공황의 근본원인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의한 생산의 무정부성, 즉 사회전체의 구매력을 계산하지 않고 이윤욕구에 의해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소비자의 구매능력에 관계없이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판다. 고전파에서는 가격에 의해 생산량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가격은 누가 정하는가? 그 대답은 '보이지않는 손'이다. 보이지않는 손에 의해 시장가격이 조절되고 상품의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루어 전반적인 과잉생산공황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의 이론이었다. 사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영국의 경제학자 A.Smith가 처음 이야기 한 것으로 완전한 자유경쟁, 자유방임주의를 최선의 것으로 생각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금과옥조 같은 신념이었다. 그러나 고전파 맬서스는 자본가는 끊임없는 축적을 목적으로 하기에 이윤보다 적게 소비하고 저축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 과잉 생산 가능성’을 처음 인정하였다. 그리고 케인스는 국민경제순환모형을 설정하고 이 모형에서 기업과 가계는 수요자도 되고 공급자도 되어 화폐와 재화는 끊임없이 순환한다고 본다. 이 모형에서 국민소득은 증가(주입)하기도 하고 감소(누출)하기도 한다. 누출에는 저축, 조세 등이 있고 주입에는 투자, 정부지출 등이 있다. 저축은 제품에 대한 구매로 나타나지 않기에 기업의 판매수입을 감소시켜 생산요소의 구매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누출이다. 투자는 생산요소의 구매를 위한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입이다. 이 모형에서 정부가 없다면 누출과 주입의 일치는 저축과 투자의 일치 문제가 된다. 이는 사실상 생산량과 수요량의 일치 문제이다.

 

총공급≡ C + S = C + I ≡ 총수요

                                                            C : 소비, S : 저축, I : 투자

 위 식에서 결국 총공급과 총수요가 같다면 누출과 주입이 같고 그러면 저축과 투자도 일치한다. 여기서 세의 법칙은 저축은 모두 투자로 가기 때문에 과잉생산은 없다고 보지만 케인스는 저축이 반드시 투자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케인스는 고전파의 대부자금설(이자율을 매개로 저축과 투자는 일치)과는 달리 저축은 소득에 대해 반응하고 투자는 기대수익에 반응하기 때문에 저축과 투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고전파에서 화폐는 실물경제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인플레이션만 일으키지만 케이스는 실물경제에 영향을 주는 매개물이므로 저축과 투자는 불일치한다.) 그래서 케인스는 정부의 총수요 관리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생 애

 1883년 경제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케인즈는 1897년 이튼 스쿨에 입학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그 후 케임브리지대학의 킹즈 대학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고용과 소득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고용의 문제보다는 생산과 교환에만 주력하였으나 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고용수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저축과 투자가 자동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부의 간섭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화폐를 수동적으로 보지 않고 능동적으로 보았다. 이자율에 의하여 화폐수량이 결정되고 투자액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1936년 [고용과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발표하여 기존의 이론들은 일반이론이 아니라 특수이론에 불과하다고 역설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고전파의 이론은 투자와 저축이 일치하는 경우에 국한되는 이론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자는 이자율과 자본 수익률에 의하여 결정되는 변수이고 저축은 소득수준에 의하여 결정되는 별개의 변수이므로 이 변수가 꼭 일치되어야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투자와 이자율의 관계

 전통적으로 고전학파는 기업의 투자는 이자율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자율이 낮아지면 투자의 기회비용이 감소하므로 투자가 증가하고, 이자율이 높아지면 투자의 기회비용이 증가하므로 투자가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이자가 내려가면 은행에서 더 적은 부담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케인즈는 비용보다는 수익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실제 기업가들이 투자하는 양상을 보면 이자율로 투자여부를 결정짓지 않고 이 사업이 얼마나 수익성이 있느냐에 대한 기대에 입각해서 투자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미래의 사업성이나 투자환경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 이자율이 아무리 떨어져도 기업가는 투자를 크게 늘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요컨대 기업가는 야수와 같이 동물적 감각으로 투자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자가 내려도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투자가 활성화되지 못한다고 본다.

 

한계

 케인즈주의는 대공황의 해결책으로 정부의 총수요 관리정책을 제시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은 케인즈주의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연도

실업률, %

연도

실업률, %

연도

실업률, %

1928

4.2

1933

25.2

1938

19.1

1929

3.2

1934

22.0

1939

17.2

1930

8.9

1935

20.3

1940

14.6

1931

16.3

1936

17.0

1941

9.9

1932

24.1

1937

14.3

 

 

 

위의 표에서 보듯이 미국의 뉴딜이 시작된 것은 1933년 부터이지만 2차 대전에 참전하기전까지 실업률은 고율이었다. 이는 대공황을 구제한 것은 케인즈주의가 아니라 2차 대전이라는 대량의 살육과 파괴였음을 보여준다. 즉, 케인즈주의에 기반한 수정자본주의가 대공황을 해결했다는 주장은 왜곡이다.

 케인즈는 과잉생산의 필연성을 부인 가능성만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정부의 유효수요 창출로써 가능성이 현실화 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케인즈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독점자본을 위한 국가의 재정‧금융 수단을 통한 유효수요의 창출은 독점자본의 축적, 확장욕을 더욱 자극 과잉생산을 더욱 심화시켰다. 케인즈주의의 한 축은 성장, 한 축은 공황구제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시장이 필요한데 사회보장제도를 통한 노동자 계급의 소득 증대가 시장과 유효수요를 제공했다. 과잉생산의 압력을 소비만을 위한 생산을 증대함으로써 완화시킬려고 하는데 전쟁, 군수 산업이 대표적이며 평상시에는 냉전을 격화시킨다. 국가에 의한 독점자본의 구제는 독점자본의 과잉생산 설비, 과잉생산 능력을 그대로 보존하므로 과잉은 증대되고 독점적 경쟁은 격화되고 위기는 만성화하게 된다. 국가에 의한 독점자본의 구제 방법은 지불수단을 공급하는 방식이며 이는 중앙은행의 불환은행권 증발에 의존하므로 악성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되면 유효수요 창출을 통한 성장도 한계에 도달 자본주의적 모순이 격화된다. 즉, 공황,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결합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 현상은 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고 이때 반케인즈주의를 외치며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