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다큐멘터리

계급사회의 한계를 드러낸 잉카 문명

연이야 2012. 6. 7. 00:21

잉카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을 기반으로 번영했던 문명이다. 50년 동안 남북으로 4천 킬로미터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80여개의 언어권을 통일하였다. 이 짧은 시기에 광대한 지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잉카의 사회 체제, 그들의 철학, 미이라 문화가 복합적인 원인이었다. 잉카 문명에서 미이라 문화의 기원은 일로사막이다. 이 지역은사막이 발달한 데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어서 토양에 소금이 많기에 자연스럽게 미이라가 남게 되었다. 여기에 산자들의 죽음에 대한 경의, 슬픔 극복의 감정이 더해지면서 미이라를 산 사람같이 대우하며 같이 생활하였고 이후 미이라는 잉카 문명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는 황제의 사후에도 황제를 미이라로 만들면서 타 부족에 대한 심리적 지배의 효과와 맞물리면서 영토 확장에도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스페인 침공 직전 여러 황제의 미이라를 지지하는 각 세력간 권력 투쟁으로 제국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미이라 문화만으로 광활하고 험난한 안데스 지역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잉카의 사회 체제 때문이다.

잉카제국의 대표 유적지 마추픽추

 

안데스는 산지로 이루어졌으며 평야 지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식량의 확보는 필수이다. 이 단서는 잉카 문명권 곳곳에 남아 있고 천상의 도시 마추픽추 주변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계단식 밭이다.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 콩, 고추, 감자, 토마토 등 20가지의 곡물을 생산하였다. 낮은 곳에 있는 밭과 높은 곳에 있는 밭은 높이 차이가 상당히 나며 높이에 따른 온도 차이를 이용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였다. 또한 제국 전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잉카 로드 및 다리를 건설하여 지역간 교역 및 퀴푸(일종의 매듭 줄, 잉카는 문자가 없음)를 이용한 정보 전달을 하였다. 잉카 로드는 제국 통치의 수단이고 유지의 수단이다. 잉카 로드 곳곳에 콜카라는 작물 저장소(최대 5∼7년 보관 가능)를 세워 흉년을 대비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또한 높은 생산량을 바탕으로 노인과 어린이들에게도 여러 혜택을 주는 지금으로 말하면 복지 국가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마추픽추를 건설하기 전 잉카는 주변 부족과 식량 확보를 위한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계속된 전쟁은 아마도 잉카 사회에 불안 요소임이 분명했다. 9대 파차쿠티가 황제에 오르면서 여러 개혁을 추진하고 게단식 밭, 잉카 로드를 통한 물자와 정보의 소통은 식량 생산량의 증대와 더블어 제국의 힘이었다. 마추픽추역시 이시기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이 힘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 전쟁을 벌였다면 많은 희생이 따라야 되고 그러고도 무조건적인 복속을 장담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늘어난 식량을 이용하여 주변부족에 배타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복지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주변 지역을 잉카의 문명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유재산제 이후 계급사회의 한계에서 잉카 제국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잉카제국 말기 권력 투쟁은 이런 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스페인 침공이 없었어도 제국은 멸망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참고 : NHK 문명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