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는 제한적 권리이며, 절대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누진과세는 소유권이 절대권리가 아님을 시사한다. 또한 소유는 다툼의 대상이 되며 타인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사회 외부에 있는 권리이다. 즉, 소유는 자유와 평등과 같은 자연권이 아니다.
소유 정당화의 대표적 논거는 선점권이다. 프루동은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극장이 공공의 재산인 것처럼 각자가 차지한 자리는 마땅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명제의 진정한 함의는 소유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은 가질 수 없다는 의미로 평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소유의 대상은 기억, 상상력, 힘, 아름다움 같은 생득적인 것과 밭, 물, 숲과 같은 획득적인 것으로 나뉜다. 생득적 소유에 우월한 이들은 획득적 소유물을 배타적으로 취득할 기회도 많다. 그래서 균형과 정의 추구, 여러 가지 계약은 생득적 소유물의 불평등을 획득적 소유물의 평등을 통해 가능한 범위내에서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점유할 권리는 우리의 노동과 소비에 필요한 한도 내에서 유효하다. 그런 점에서 선점은 권리의 평등으로 귀결되고 소유를 가로 막는다. 선점은 인구에 종속되며 점유란 법적으로 고정될 수 없다. 선점자는 점유자나 용익권자가 되지만 소유권자로서의 자격은 없다. 이 용익권자는 사물을 변형, 축소할 배타적 권리는 없고 사회의 감시 아래 있으며 노동의 조건과 평등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로마인의 소유의 정의는 무효화된다.
프랑스 경제학자 세는 토지는 비유동성 때문에 토지에 대한 선점이 배타적 소유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루동은 땅은 비유동성으로 공기보다 소유권을 행사하기는 쉽지만 가능성을 권리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은 토지가 물, 공기와 달리 그 양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유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소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프루동은 주장한다. 물, 공기는 무한히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공동의 사물이 되어야 하며 토지는 그 양이 훨씬 적고 생명 유지에 필수이기 때문에 공동의 사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유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유가 보편적 동의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프루동은 자발적 동의는 보편적 동의(평등에 의해 소유권을 정당화)가 전제되었다. 그런데 이후 소유권 때문에 소유권 때문에 소유권의 전제인 평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그렇다면 보편적 동의는 철회되고 소유권은 계속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유를 정당화시키는 또 다른 논거중 대표적인 것은 노동을 소유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즉, 자연 상태의 토지에 노동이 결합함으로써 토지는 사유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루동은 여기에 대해 첫째, 노동 활동을 벌인 토지 점유자는 생산물의 수확을 통해 자신이 투입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몫을 확보한다. 따라서 점유자에게는 생산물이외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할 추가적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설령 노동이 토지의 소유권을 부여해 준다 하더라도 왜 최초의 소수에게만 한정되고 이후의 다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소유의 정당성을 노동에서 찾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배타적 소유의 부당성 논리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신고전파는 수퍼스타나 전문경영인의 높은 소득을 수요와 공급 원리의 결과로 이해한다.(크루그먼은 노조의 약화, 보수 이념의 확산, 기득권층의 이익을 반영하는 정치환경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이에 대해 프루동은 특출한 재능의 소유자라 해도 평범한 사람이 같은 노동 시간을 투입하여 벌어들이는 몫과 동일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프루동 입장에서 소유는 노동, 점유, 법률로도 창출할 수 없고 폭력과 권위에 기반한 원인 없는 결과일 따름이다. 그래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둑질’이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이 명제는 소유를 근거로 획득하는 소득은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을 수반한다. 소유란 ‘소유자가 자신의 표찰을 붙인 사물에 대해 행사하는 불로 소득권’이며 소작료, 임대료, 지대, 이자, 이윤 등이 불로소득에 해당된다. 불로소득권을 정당화하는 것은 노동, 토지, 자본이 생산적이라는 경제학의 가르침 때문이다. 즉 생산에 기여하는 토지, 자본을 빌려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지도, 노동도, 자본도 그 자체로는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들어 비판한다. 그렇다면 지주, 자본가의 불로소득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는 노동이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임금보다 훨씬 많은 잉여이다.
소유를 정당화하는 논리중 소유는 자신의 경제적 활동의 성과를 보다 많이 가져가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결국 인류 전체의 풍요를 가져온다고 한다. 반면 학문 자체에 대한 열정,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과학 발전, 발명의 원인이라는 반론도 있다. 프루동은 여기에 대해 사회적 협력과 연대라고 밝혔다.
프루동은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점유권만을 인정하였고 생산물에 대해서는 생산자의 배타적 소유를 인정했다. 그가 꿈꾼 사회는 모든 생산은 집단적이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비례해서 생산물과 이익에 참여하며 자본은 누구도 배타적 소유권을 가질 수 없고 자유로운 개인들이 평등의 제약 아래 시장에서 생산물을 교환하는 상호부조경제이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를 완전히 금지하는 공유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공유제는 소유제와 정반대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본질적 특성은 동일하며 자발성과 자유 의지를 침해하고 인간을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한다. 프루동은 평등, 법, 독립성, 비례균형의 원리에 토대를 둔 사회의 가능성을 아나키에서 찾는다. 사실 프루동이 꿈꾼 사회는 구체성이 떨어지지만 ‘소유제가 존속되었던 것은 소유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사람들의 사고가 평등에 매달려 있음에도 평등이 실현되지 못했던 것은 소유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경제의 교양을 읽는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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