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맑스주의 역사 강의 ③

연이야 2013. 2. 28. 20:09

6강 러시아혁명과 레닌(1) - 1917년 이전의 러시아와 레닌

러시아 혁명의 배경

- 혁명의 전사(前史)

  러시아는 1861년 농노를 공식적으로 해방시킨다. 이는 봉건제에서 근대 국가로 전환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농노해방이 곧바로 러시아를 서유럽의 근대 국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오히려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농노해방은 농노들에게 토지만 빼앗는 재앙이 되었다. 차르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 토지개혁을 하지만 지주계급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유상분배의 방식을 취한다. 토지를 농노에게 비싼 가격으로 팔고 질불 능력이 없을 경우 49년에 걸쳐서 상환하는 의무를 지운다. 그 결과 농노들은 신분적으로는 해방되지만 경제적으로 더욱 종속되어 이전 보다 더 혹독한 생활이 강요된다.

 

- 인민주의

  농민의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저항이 일어나고 상층 출신의 운동가들도 나타나면서 등장한 사상이 ‘인민주의’이다. 러시아 농촌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적 성격이 강했으며 농노 해방 이후에도 독자 영농을 통해서는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자 상호부조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따라 공동체는 훨씬 강화된다. 이들 공동체는 사실 강압적이고 보수적이었으며 장로들이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인민주의자들은 이 공동체를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시키면 평등 사회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인민주의자들은 농촌공동체에 기반을 둔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진입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중의 계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지만 농민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자 원래의 운동방식을 고수한 사람도 있었지만 테러리즘으로 급선회한 사람도 있었다.

 

- 초기 러시아 맑스주의 ; 2단계 혁명론

  러시아에서 초기 맑스주의는 이론적으로만 수용한 지식인도 있었지만 혁명적 실천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레닌, 플레하노프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특히 초기에는 플레하노프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경제결정론이고 진화론적 입장에서 2단계 혁명론를 제시한다. 2단계 혁명론은 러시아는 봉건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부르주아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성숙의 단계를 거친 다음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이행해야 된다는 것이다. 1890년대부터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맑스주의자와 인민주의자들의 논쟁의 논점이 봉건제에서 사회주의로 바로 가느냐,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를 거쳐서 사회주의로 가느냐이다.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발전하는데 장애를 인민주의자들은 협소한 시장 때문이라고 봤다. 이에 레닌은 러시아에는 전자본주의적 요소가 많이 있지만 시장도 충분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이 주장의 전제는 자본주의가 발전해야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플레하노프의 2단계 혁명론의 틀내에 있음을 보여 준다.

 

러시아혁명의 새로운 흐름

- 러시아 사회민주당 창립

  ‘이스크라파’ 중심으로 맑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창립되고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당원 자격에 대한 레닌과 마르토프의 논쟁으로 볼세비키와 멘세비키로 나뉘어 진다. 레닌은 당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당은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비합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을 하려면 군대적 위계에 의해서 훈련되고 정치의식도 성숙하고 입장도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전위당 이론 :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당시 노동운동이 경제투쟁에만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르를 전복하는 투쟁, 즉 정치투쟁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중의 자생성에 지도자의 의식적 지도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한다. 혁명운동에만 종사하는 직업적인 혁명가들의 지도하에 운동의 수공업을 탈피하고 규율 잡힌 운동을 발전시켜야 하고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조직이 전위당이라고 한다.

  1902년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에서 러시아혁명에서 농민 문제가 중요하며 농민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인민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농업에 있어서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켜 러시아 농민의 계급분화를 유도하고 계급투쟁을 고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농업을 자본주의적으로 빨리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에게 토지를 제공해서 중소 자영농을 육성하고 중소 자영농의 연합체로서 농민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1905년 혁명과 소비에트

  1905년 혁명은 1861년 농노해방 이후 모순과 대외적으로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가 배경이다. 러일전쟁의 패배는 차르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되고 체제의 안전성이 의심받게 된다. 이런 상화에서 ‘피의 일요일’사건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 차르라는 생각은 깨지고 차르 체제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907년까지 자생적 파업, 농민반란이 계속된다. 이에 차르는 몇 가지 양보안을 담은 10월 선언을 발표하지만 혁명의 열기가 사그라지자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르 체제를 전제하고 시행되었던 스톨리핀의 개혁을 통해서 차르는 조금씩 안정되어 간다. 결과적으로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혁명을 해본 경험은 소중한 성과물이었다. 그리고 자생적 정치 모델인 소비에트라는 성과물을 얻었다. 공장, 마을 단위에서 대중들이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고 이들을 파견해서 대의기관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1917년 혁명에서도 소비에트는 중요한 주체가 된다.

 

- 1905년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평가

  멘세비키는 플레하노프의 2단게 혁명론의 관점에서 1905년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이 혁명과 사회주의혁명사이에는 긴 시간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수립된 정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도적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부르주아혁명이 곧바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이어진다는 연속혁명론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세계혁명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멘세비키의 중간 입장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바로 사회주의적으로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는 트로츠키의 입장에 가까워지지만 아직까지는 2단계 혁명론을 고수한다. 그리고 레닌은 노동자, 농민 모두 중요하다는 입장으로써 자본가 계급은 반동적이고 자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의 과제들을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연대한 노동자, 농민이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가 지나면 사회주의로의 투쟁이 전개되고 이때는 노동자가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이다.

 

 

7강 러시아혁명과 레닌(2) - 1917년 혁명과 소련의 성립

2월 혁명에서 10월 혁명으로 : 사회주의혁명으로의 발전

  1905년에서 1914년까지 러시아에서는 농촌의 급격한 해체로 많은 농민들은 노동자나 도시 빈민, 게절노동자로 된다. 대외적으로는 산업화를 위한 무리한 차관 등의 요인으로 1차 대전에 참가하고 러시아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른다. 이런 모순에 의해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난다. 국제 여성의 날에 빵을 달라는 시위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전쟁에 반대한 군인들의 혁명 가담농민들의 빈곤이 혁명의 동력 역할을 했다.

  2월 혁명을 계기로 차르 체제는 막을 내리고 임시정부가 국가 행정권을 장악하지만 러시아 전역의 인민에 대한 통제권은 가지지 못한다. 대중들로부터 더 큰 지지를 받는 정치조직은 소비에트였다. 임시정부에 대립해서 인민들 자신의 권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각 소비에트마다 입장이 달라서 러시아 전체의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2월 혁명 직후는 이중권력이 존재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혁명 초기에는 모든 혁명 세력이 제헌의회 구성에 찬성하면서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러시아 정세가 급변하면서 레닌의 급진적 주장이 제기되고 이후 볼세비키는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다. 레닌은 ‘4월 테제’에서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자고 주장하고 혁명을 주도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을 찬성하는 속에서 전쟁 종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이 혁명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곧바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연속혁명론의 입장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에 볼세비키는 7월 봉기를 시도하지만 탄압을 받고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한다.

 

맑스주의 국가론을 다시 생각하다 ; ‘국가와 혁명

  레닌은 맑스의 ‘프랑스 내전’의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기성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라는 구절을 ‘국가와 혁명’에서 무장봉기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고 기존의 국가를 파괴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그리고 프랑스 내전의 파리코뮨과 유사한 정치체 소비에트를 새로운 정치체로 제시한다. ‘국가와 혁명’ 6장 ‘기회주의자들에 의한 맑스주의의 속류화’에서는 플레하노프, 카우츠키와 판네쿡을 비교한다. 카우츠키는 국가권력의 장악만 이야기 하지 국가권력의 파괴는 아나키즘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국가주의적 입장에 있다고 비판한다. 판네쿡은 많은 오류가 있지만 국가권력의 장악과 국가기구의 파괴라는 것을 구별 카우츠키를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아나키스들은 단 한 번에 국가권력이 폐지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없다고 봤다. 이는 국가기구를 계급지배의 결과물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를 계급지배와 억압의 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 맑스주의에서 정치적 지배는 토대에 있어서의 계급지배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결과물일 뿐이다.

  그리고 레닌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집중하는 것이 중앙집중적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중화된 소비에트 공화국이며 이런 관점에서 ‘프랑스 내전’에서 맑스가 옹호한 코뮨이 (아나키즘적)연방제라는 베른슈타인을 비판한다. 즉 진정한 민주주의나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조응하는 새로운 정치체의 설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소비에트 국가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계급지배와 기존의 국가는 없어져야 한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는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는 통제와 지배가 없어지고 사물에 대한 인간의 관리만 남는다. 그런데 지배가 관리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관리업무는 아주 단순화되어야 한다고 봤다.

 

10월 혁명의 과제들

- 혁명이 직면한 문제들

  10월 혁명을 성공한 볼세비키는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하지만 다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레닌은 제헌의회를 해산한다. 그래서 맑스주의 진영 안에서도 많은 논쟁과 비판이 뒤따랐다. 두 번째 논쟁은 농민과 농촌공동체가 토지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 토지령이다. 더 나아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사실상의 토지재분배 조치도 허용한다. 이는 사회주의혁명가당(인민주의자)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많은 맑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독일과의 굴욕적인 종전 협상인 ‘브레스트-리투프스크 조약’ 체결이다. 볼세비키는 10월 혁명 직후에는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와 연합했는데 이 종전 협상으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연합정부에서 탈퇴하고 볼세비키는 의도치 않은 일당독재를 하게 된다. 게다가 이 조약에 반대한 프랑스, 영국이 러시아를 침공한다.

 

-서유럽 혁명의 불발

  볼세비키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도 혁명을 한 것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혁명이 곧바로 뒤따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소련의 고립이 스탈린 체제의 객관적 조건이다. 당시 유럽의 자본가와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 사민당은 보수 세력과 연합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무장봉기를 진압하고 학살한다. 이후 사민주의와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방식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700∼800만명의 인명피해가 난 내전이다.

 

- 전시공산주의

  이런 상화에서 경제정책은 중요해지며 중앙정부에 의한 계획경제, 사유재산의 급속한 폐지, 주요 물자에 대한 배급제, 작업장에서의 노동규율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전시공산주의 경제정책이 실시된다. 전시공산주의 정책은 내전상황에서의 현실적 필요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하지만 식량배급제는 중농과 부농의 반발을 불러오고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대립도 심화된다. 그리고 노동규율 강화도 노동자 입장에서는 우두머리만 볼세비키로 바뀌었지 힘든 일을 강제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통제는 더 치밀해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반감은 커졌다.

 

새로운 시대의 맑스주의 ; ‘제국주의

  제국주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단계로 전통적인 산업자본주의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①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변화 ②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융합한 금융과두제가 제국주의 단계의 지배자 ③자본수출이 주가 된다. ④국제적인 자본가 단체가 세계를 분할 ⑤자본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의 영토분할이 완료된 상태이므로 이윤 경쟁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야기한다.

  카우츠키는 조직자본주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본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호합의를 통해 경쟁을 조절함으로써 전쟁이나 파국에 이르지 않고 자본주의를 계속 지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초제국주의 단계는 생산의 사회화는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의회전술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봤다. 반면 레닌은 제국주의로의 전화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야기하고 이로 인해 혁명이 일어난다고 반박한다. 레닌은 생산의 사회화는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한 중요한 전제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 자체로는 결정적이지 않으며 정치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경제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결합해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제국주의와 후진 자본주의국가 또는 식민지간의 모순)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순)이 서로 조응해서 세계혁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통해서 제2인터내셔널의 방어전쟁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제2인터내셔널 정통파의 붕괴론은 선진 자본국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레닌은 이에 대해서 제국주의 내부모순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초과이윤의 일부를 자국 노동자에게 분배해서 완화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의 수탈은 강화되어 제국주의 내부의 모순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의 모순으로 이전되며 러시아혁명은 여기에 부합된다. 이렇듯 ‘제국주의’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 점이 가장 큰 성과이다.

 

신경제정책(NEP) :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전시공산주의는 효율적으로 내전을 수행했고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했고 짧은 시간 내에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사회 모순을 심화시키고 크론시타트 수병반란도 초래한다. 이렇게 인민들의 불만이 컸고 한편으로는 내전이 볼세비키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이 본격화 된다. 네프의 핵심은 농민, 농업 정책의 변화이고 이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속도를 늦추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현물세는 세금을 현물로 내고 남은 곡물은 농민에게 돌려 주는 것인데 이 때문에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고 소비재 공업도 활성화된다. 네프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지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유화적인 분위기가 차츰 형성된다.

그러나 농민계급의 계급분화가 심화되고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저임금이며 노동통제도 완화되지 않자 불만이 고조된다. 그리고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네프로는 마련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렇게 되면서 볼세비키내부에서는 네프의 지속 여부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8강 코민테른과 스탈린 체제

코민테른의 성립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대항한 반대파(치머발트 좌파가 중심)들이 1919년에 만든 조직이다. 정치적으로는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과 볼세비키 강령에, 이론적으로는 레닌의 ‘제국주의’와 ‘국가와 혁명’노선에 근거하고 있다. ‘제국주의’노선에 근거한다는 것은 선진 자본국 뿐만 아니라 후진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코민테른에서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아주 중요한 과제로 설정한다.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21개조’를 통해 사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맑스주의의 두 흐름이 공식적으로 분리되고 레닌의 ‘식민지와 민족 문제에 대한 테제’를 발표한다. 소련을 구성한 여러 소수 민족들의 자결권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공식적으로 중요한 과제로 설정한다. 이 테제에 근거해서 동방민족대회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정치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동방대학이 설립된다.

 

스탈린과 소련의 발전방향을 둘러싼 논쟁들

- 스탈린의 부상

  스탈린은 체포와 유배, 탈출을 반복하면서도 러시아를 떠나지 않고 활동을 했으며 실무적인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특히 볼세비키의 민족문제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레닌이 스탈린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상당히 신뢰했기 때문이며 스탈린은 의견충돌이 있더라도 결국 레닌의 의견을 따른다. 하지만 레닌 말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을 둘러싸고 스탈린은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형식적으로 민족자결권을 말하지만 자치권 정도이다. 반면 레닌은 철저한 민족자결권의 입장에서 연방을 구성하는 국가들에 정치적 독립과 연방 탈퇴의 권리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스탈린이 레닌의 안을 일부 수용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한다.

 

-스탈린의 권력장악

  레닌이 죽고 과두 통치가 나타난다. 이들은 트로츠키를 견제 실각시키지만 스탈린을 제외하고 다시 트로츠키와 연합반대파를 형성한다. 이에 스탈린은 부하린과 동맹 연합반대파를 몰아내고 부하린을 숙청한다.

 

- 정치투쟁 과정에서의 논쟁들

  스탈린은 1928년쯤에는 1인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며 공식적으로는 네프의 계승 여부 등 향후 소련 경제의 전망을 놓고 싸운다. 우익반대파는 네프를 긍정적으로 본다. 네프는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물적 토대를 안정화시키기 때문에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 중요하며 네프는 상당 기간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업의 발전, 농업에 기반한 소비재의 발전 그리고 중화학공업 발전이라는 단계적이고 점진적 공업화의 길을 제시한다. 좌익반대파는 농민은 반동적 계급이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을 착취해서 그 물질적 토대에 근거해서 중공업 위주의 급속한 산업화를 해야 하며 농업은 집단농장방식을 통해 산업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다가 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할 즈음에는 좌익반대파들의 주장을 전면 수용해서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한다. 이 논재의 세 노선은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사회주의 중요 과제로 설정했고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개발을 해야 한다는 공통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 시기의 소련과 스탈린 주의

-일국사회주의론

  일국사회주의론은 1924∼1925년경에 본격적으로 주장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독일에서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른 국가에서도 혁명적 분위기는 잦아들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이에 볼세비키는 선진국의 사회주의혁명 없이 고립된 소련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볼세비키들은 어떤 후퇴나 타협을 하더라도 혁명을 지키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세계혁명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에 노선 변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람이 스탈린이다. 즉 선진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도 소련 혼자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일국 내에서 가능해야 하고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해야 하며 국내적으로는 볼세비키 권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1차 5개년 계획이 나온다. 경제 전반을 중앙에서 철저히 계획하고 전면적 공업화를 우선적으로 실시하고 이를 위해서 농업의 급속한 집단화를 추진한다. 집단 농장화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실시되었다. 급속한 경제개발계획과 농업집단화 당시는 소련과 영국⦁프랑스간의 갈등이 고조된 시기이다. 전쟁을 대비하려면 중화학 위주로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고 외교가 단절되면서 차관, 원조가 중단된다. 이렇게 되니까 자력갱생의 길밖에 없게 되면서 강박적으로 작동되었다.

  5개년 계획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①생산력의 증대 ②소비재 공급 부족 ③2차 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토대 마련은 이루어졌다. 이렇듯 영국과 프랑스에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은 체결된다.

 

-스탈린 테러

  1934년 스탈린의 심복중 심복인 키로프가 암살되고 이를 빌미로 스탈린의 잠재적 반대자들을 숙청 내지 암살을 하는 대테러가 일어난다. 공식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 80만 명 정도가 암살되고 주로 군, 행정조직, 당조직의 고위직 내지 중요한 직책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살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점은 왜 대테러가 이때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내부에 저항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독일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아주 강했다. 그래서 전쟁 이전에 잠재적 반란자들을 없앨 필요를 스탈린이 강박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설명이 많다. 이렇듯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스탈린주의만을 현실사회주의의 모순의 원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탈린 시대는 사회주의혁명이 현실화되었고 당면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이론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일부 반스탈린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의 천박한 철학이 소련을 지옥으로 만들었고 강조하지만 달라진 과제에 대한 대응방식이나 주체들의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스탈린주의의 천박한 철학을 지적할 때 등장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은 대중교재로 나온 책이기 때문에 쉽게 쓰여져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은 변증법의 규칙들을 교조화하고 이 규칙들로 사회 전반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스탈린주의의 중요한 이론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론’이다.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모순의 이전으로 붕괴가 일시적으로 지연될 가능성을 레닌은 언급하지만 스탈린은 이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도 전면적인 위기에 봉착해 곧 위기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2차 대전 후 냉정체제에서 소련은 페쇄적이고 통제적인 방식으로만 맑스주의가 전개되었고 서구의 좌파들은 맑스주의를 계승함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대한 반감은 냉전의 유산이다. 냉전의 세계적 정세를 스탈린은 ‘진영 테제’에서 세게는 제국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고 현 단계에서 중요한 모순은 진영간의 모순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