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자본주의에 불만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① ( E. K. 헌트 저)

연이야 2013. 5. 14. 19:25

이 책은 1972년 처음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일곱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관심을 받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사상사이다. 《소유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79년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적이 있지만 군부 독재시절이었기 때문에 책이 기형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제대로 소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2003년 개정 7판을 새로이 번역했다. 제목처럼 이 책은 자본주의에 불만이 있거나 비판하고 싶지만 정확한 실체를 모르는 이들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여러 경제 이론을 쉽고 정확히 알려준다.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맞은 이 시기에 세계를 해석하고 바꾸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주류 경제학의 모순과 허구성을 비판하는 급진주의 경제 사상과의 대결의 역사를 균형 있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약과 부록을 통해 경제 이론의 핵심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적 모순과 갈등을 완화하고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자본주의가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를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념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다음은 이 책의 주요 내용에 대한 요약이다.

 

-자본주의 이전 유럽의 이데올로기

인간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단생활을 하면서 분업을 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생산력의 증가가 따랐다. 물론 초창기 분업은 기능에 따른 것이지만 생산력 증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분화로 이어졌고 소수의 유한계급이 나타났다. 위계적 계급 분화가 나타나는 체제에서는 공통된 세계관이나 형이상학 체계에서 생겨나는 공통된 정서와 가치는 생산 업무 분담과 계급 분화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이 공통된 정서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서는 인구의 80%가 노예였다. 철학자들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열등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우월한 만큼 노예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노동이 천하다고까지 생각하였다. 그 결과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고 허약한 경제와 취약한 정치, 사회는 무너졌고 그 자리를 봉건주의가 대신하였다.

 

중세 봉건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은 관습과 전통이다. 중세의 농노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었고 토지를 점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농노들은 관습에 따라 영주의 밭을 경작하고 세금을 냈다. 가톨릭교회는 중세 시대 최대 토지 소유주였고 서유럽 전역에서 종교적 영향력이 강력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강력한 중앙 정부에 가까운 존재였다.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기독교 가부장적 윤리이다. 즉 권력과 부를 누리는 자들은 아버지나 가족의 보호자에 비유되고 자식들로 비유되는 농노들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농노들은 사회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부와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기독교 가부장 윤리에서 영주는 아버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물질적 부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농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부는 거의 필요치 않았다. 그 결과 엄청난 불평등과 착취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는데 이용했다. 또한 물질적 부의 축적은 권력 확대와 사회적 상향 이동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상거래에서 판매자는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지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격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 가격을 의무로 제시하였다. 고리대금 역시 이런 이유에서 금지하기도 하였다.

 

-초기 자본주의 이행과 중상주의의 기원

중세 사회는 농업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농업 생산성의 증대는 심대한 변화의 원인이 되었고 봉건주의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출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기독교 가부장 윤리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어야 했다.

 

자본주의는 세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시장 교환의 보편성은 인간들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냉정하고 비인격적으로 변화시킨다. 둘째,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분리와 자본가의 배타적 독점적 생산수단의 소유이다. 이에 따라 자본가는 소유에 따른 소득(이자, 주식 배당금, 지대, 이윤)을 얻고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서 노동력을 팔수밖에 없다. 셋째, 이윤 추구를 통한 자원의 배분이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누가,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이냐는 문제는 이윤 추구에 의해 결정된다.

 

중세 농업 기술의 발전의 핵심은 이포제 대신 삼포제가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대했다. 이는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무역과 상업의 확산으로 나타났고 무역과 상업의 확산은 도시와 산업의 팽창을 더욱 부추겼다. 특히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상업은 더욱 팽창했다. 십자군은 우연적이거나 외부적 요소가 아니며 동방을 상대로 무역관계가 점점 커지고 내부의 사회적 소요를 배출할 출구가 필요한 프랑스와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싶어 한 베네치아 과두정의 내부 발전과 필요에 의해서이다.

 

공급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서 상인이 점차 생산과정을 통제하게 된다. 처음에는 상인이 원료만 공급하다가 점차 도구와 기계 혹은 작업장까지 소유하는 선대제가 등장하고 장인들은 차츰 노동자화하게 된다. 그 결과 16세기 수출산업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가 대다수 생산과정에 확대되면서 자본주의가 지배적 체제로 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처음부터 제품에 관련된 수요를 이용할 수 있는 독점적 지위를 추구했다. 예를 들면 상인-자본가 고용주 협회가 부상하면서 부유층 자제들에게 온갖 특권과 면제를 주는 반면 가난한 장인들은 이런 장벽에 맞혀 자본가 계급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노동 계급으로 노동력을 팔아야 했다.

 

도시의 확대로 인한 도시 농촌간 기능 분화의 확대는 장원의 농노들에게는 잉여생산물을 화폐로 교환 할 수 있고 부역 면제권도 살 수 있었으며 부역 대신 현금 소작료로 낼 수 있게 하였다. 결국 금납화는 농노들을 소규모 독립 자영업자에 가까운 지위로 바꾸었다.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노동 임금의 상승과 지대의 하락으로 나타났다. 봉건 귀족들은 이런 상황에서 농노들에게 부역의 의무를 부할 하려고 했지만 농민들의 반란과 그에 맞선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변화의 힘을 봉건 귀족들은 막을 수 없었고 장원은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16세기는 낡은 봉건 질서와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가장 큰 변화는 노동 계급의 형성이었다.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소작인의 3/4, 내지 9/10가 농촌에서 쫓겨나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화폐지대가 터무니없이 오르면서 많은 농민, 자작농, 소귀족이 파산했다. 그 뿐만 아니라 길드의 많은 장인들도 파산하였다. 이런 식으로 토지에서 밀려나거나 예전의 생산수단을 이용할 수 없게 된 농민과 장인은 부랑자가 되거나 거지가 되었고 노동 계급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랑자를 단속하는 가혹한 법률이 통과되고 정부의 억압이 동원된다.

 

16세기 항해술의 발달은 유럽으로 금/은 유입과 식민주의 시대를 열었다. 금/은의 유입은 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지주와 노동자는 소득보다 비용이 늘어났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지만 자본가는 실질 임금이 낮아진데다 원료를 사서 재고를 보관하기만 하면 높아진 가치 덕분에 많은 이윤을 얻었다. 증대된 이윤은 자본으로 축적된다. 자본은 생산, 상업에 필요한 요소로 단순히 물리적 대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상품 생산과 사적 소유에 필요한 사회적 관계가 존재해야만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본가는 자본을 소유한 덕분에 이윤을 얻고 이 이윤은 재투자되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게 한다. 금/은의 유입외에 다른 자본 축적 요소는 선대제, 인클로저 그리고 식민지 약탈, 노예무역 등이다. 이런 바탕하에서 민족국가의 등장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이행하는 시작이었다. 군주들은 부르주아의 지원을 업고서 봉건세력을 물리치고 단일 중앙 국가 권력으로 통일하였다. 그 결과 법률, 도량형, 화폐의 통일, 시장의 통합 및 군대를 동원해 상업 활동을 보호하였으며 부르주아들은 봉건귀족의 실질 권력을 빼앗았다.

 

중상주의 초기 단계인 중금주의 시대에서는 자국의 금/은 보유를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욕망은 무역 수지 흑자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많은 금/은이 자국으로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중상주의 시절 많은 국가의 규제는 자본가의 이익을 장려하기 위해서지만 오히려 이런 규제는 이윤 추구에 제약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자유를 국가에 요구하였다.

 

-중상주의 사상의 모순

1776년 ‘국부론’이 출간되면서 고전적 자유주의가 결정적인 지배권을 얻었다. 이 시기 개인주의 철학은 중세부터 중상주의 시대까지 존재하던 가부장적 세계관을 깨트리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의 요구를 반영하였다. 중상주의 시절 많은 규제에서 이익을 보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국가 규제 때문에 이윤 추구가 구속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개인주의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중간 계급의 개인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사례는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윤 추구라는 탐욕을 종교적 비난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를 미덕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이 교의는 인간의 죄가 종교적,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 따라 용서된다는 점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권력이 약화되었고 중간 계급의 사업 활동을 승인하는 종교적 기틀을 마련했다.

 

개인주의는 경제를 국가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을 반대하였다. 국가가 부여한 독점권과 온갖 형태의 보호와 특혜를 비판했다. 개인주의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자유롭게 경쟁하는 시장이 사회에 가장 큰 이익이 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가격이 자유롭게 변동하면서 시장의 균형을 맞추는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