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국경제성장 자본인가 노동인가 ? - 한국자본주의 성격논쟁②

연이야 2013. 5. 27. 15:03

3. 박정희체제에 대한 비판 시각의 한계

①성장은 이데올로기

이번 논쟁의 당사자들 장하준이나 이병천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우선은 박정희 신드롬의 핵심인 성장이데올로기부터 살펴보자. 박정희체제를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장 위에서만 분배, 복지 등의 논의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성장론자들은 ‘파이가 커지면 조각도 커진다’라는 논리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논리로는 빈곤을 해결 할 수 없고 오히려 고착화 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성장과 착취, 수탈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지탱될 수 없기에 이런 발상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어떤 세력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성장이데올로기의 허구는 자본축적의 상징인 고층빌딩과 빈곤의 상징인 슬럼가가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슬럼은 첨단 건축 재료를 사용하고 근대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근대의 산물이다. 슬럼가 사람들은 고층빌딩 청소부, 경비 등으로 경제체제에 결합되어 빌딩을 더 고층화하기 위한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복무하는 철저한 착취속에 있다. 결국 경제성장이 슬럼을 고층 빌딩화 한다는 것은 속임수이며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를 고층, 슬럼으로 이원화하는데 불과하다.

 

그럼에도 절대적 빈곤은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봉건시절의 농민보다 근대화 이후의 노동자가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가졌으니까 불만을 가지면 안 되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9백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해소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대중에 대한 정치적 배제와 억압을 정당화하고 엄청난 빈부격차를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② 경제민주화론자들의 자유주의적 시각의 한계

‘6월 항쟁으로 성립했던 '87년 체제'의 생명력은 92년의 3당 합당, 97년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그리고 이어 이명박 정부의 돌진적인 '두 국민' 분열 정책에 의해 거의 고갈되어 버린 것 같다.’

-이병천/프레시안

 

위의 이병천 글을 보면 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3당 합당은 왜 일어났고 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왜 일어났는지 설명이 없고 3당 합당, 구조조정, 이명박 정부의 분열 정책으로 87년 체제는 고갈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고의 전제는 정치와 경제를 따로 분리시키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기초해 있다. 사실 김대중, 노무현으로 표상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집권이후 노동과 민중의 삶을 유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몰두한 것 역시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한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주의적 시각의 바탕에는 억압적 사회구조들은 독재로 상징되는 잘못된 정치가 없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국가의 권위주의적 개입에 기인하므로 국가의 경제개입 배제 및 시장원리가 보장된다면 문제는 없어지고 이후에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1990년 3당 합당, 1997년 DJP연합은 결코 정치적 변질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음의 정승일의 말은 한번 되새겨 볼 만하다.

 

‘시민단체들이 "구체적인 작은 성공 경험들의 축적 사례"를 유별나게 재벌 개혁과 금융 개혁 분야에서 달성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둔 것은 바로 그 시민단체들이 요구한 재벌 개혁과 금융 개혁이 근본적으로 미국의 재무부-월스트리트 복합체의 요구와 서로 일치했기 때문이다.’                                                                   -정승일/프레시안

 

③ 복지국가론자들의 자유주의적 시각의 한계

물론 논쟁의 다른 당사자 장하준에게도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는 한계가 있다. 다음의 복지국가론자들의 말을 보자.

 

‘그런데 1960-1970년대에 노동착취와 반민주주의, 부정부패 등으로 물들었던 개발도상국들이 모두 2012년 현재의 한국처럼 세계적 품질의 자동차와 반도체, 스마트폰을 제조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한국은 우간다나 필리핀 등과는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박정희가 아무리 극악한 반(反)노동, 반(反)서민적인 폭압적 독재자였다 할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폭압적이었던 이디 아민(우간다)이나 마르코스(필리핀)과는 뭔가 다른 '경제' 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경제정책상의 그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발견한 결정적 차이는 바로 박정희가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매우 강하게 구사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박정희 옹호자'니 '박정희주의자'니 하는 모욕적인 호칭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목하고 싶은 점이다.’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프레시안

 

장하준은 박정희체제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도 통제했고 그 증거가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럼 우선 박정희체제가 등장하기 전 50년대부터 한국경제를 살펴보자. 전후 한국 경제는 여러 사정상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은 전후 복구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토착권력을 안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냉전체제에 따른 대공 봉쇄 전략의 반영이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대미 종속적 산업구조를 낳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삼백산업의 독점체를 중심으로 자본이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국가권력의 지원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에 독점자본으로서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자본주의 일반에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시대에는 더욱 강화되며 나아가 신자유주의시대에도 중요한 기제로 작동된다. 그러나 50년대까지는 독점자본주의의 일반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를 위한 기반이 형성되고 발전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5.16쿠데타 이후 미국은 군부의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 전략을 무력화시키고 대외지향적 개방경제체제로의 전환(일본 독점자본의 진출, 베트남 특수라는 물적 기초를 바탕으로 함)를 관철시켰다. 이는 실업자 및 불완전고용자를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막대한 국방비를 충당할 수 있는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을 육성한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한국자본주의는 급속한 성장을 한다. 이런 성장은 국가권력을 매개로 선진 자본주의국가로부터의 자본 유입, 국영기업의 확대 및 민간불하, 통화정책, 신용기구, 조세, 관세규제, 물가 및 임금수준의 가이드라인 등을 수단으로 한 사적 독점의 강화를 핵심으로 하면서 이들의 유착을 심화시켰다. 이는 독점자본이 주도적이고 지배적인 부분이 됨으로써 독점자본주의단계로 발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내부르주아의 헤게모니 미약과 선진자본주의의 열강에 의한 세계시장 분할 선점 및 그 분업체계에 규정되어 관철된다. 그래서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은 내적인 완결성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종속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된다.

 

결국 이병천은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런 점은 장하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장하준은 박정희 시절 대외적으로는 종속, 대내적으로 독점자본의 지배력 강화를 박정희체제의 자본에 대한 통제로만 보고 있다. 하지만 국가권력을 매개로한 생산외적 방식에 의한 성장은 자본주의 일반에서 존재했고 신자유주의에서도 작동되고 있다. 그리고 냉전체제속에서 미국의 대공 봉쇄 전략에 따른 여러 가지 지원(물론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하에서 경제성장을 했다는 점을 못보고 있다.

 

④ 노동 생산력의 증대

“장하준은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성공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즉 박정희가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본가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 박정희가 자본가를 통제한 세 번째 측면은 투자를 규제한 겁니다. 그게 바로 산업정책이고 경제개발계획이죠."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쾌도난마

 

장하준은 박정희체제의 경제성장의 원인을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적절한 개입, 자본가 통제와 투자 규제에서 찾는다. 과연 이 세가지만 갖추어지면 경제는 성장할 수 있을까?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의 신자유주의에서도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제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이런 관점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탄생과 발전의 핵심은 노동생산력의 증대에 있다. 이포농업에서 삼포농업으로 바뀌면서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잉여물을 낳았고 잉여물은 교환을 통해 시장을 창출했고 시장은 교환의 증가, 수송수단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성장은 원격지 무역을 확대하였고 특히 십자군 원정은 상업의 팽창을 가져왔다. 그리고 백년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로 봉건제는 뿌리에서부터 흔들렸다. 그리고 엔클로저 운동으로 무산자 계급의 출현, 금/은의 유입으로 나타난 인플레이션은 자본가의 이윤 증가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생산은 확대되었다. 한편으로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시민혁명은 이런 토대의 반영이며 결국은 자본과 임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반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박정희체제에서 성장은 장시간 저임금의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1

 

  1. 저곡가정책과 미국에서 들여온 엄청난 잉여농산물은 농민에게 큰 고통이었고 그 결과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약 680만 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산업예비군은 저임금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저임금에 기반한 수출정책이 가능해졌다. 그 당시 노동자의 사정을 전태일 열사의 편지를 통해서 살펴보자.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 …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 저는 …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1개월에 …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 숙련여공들은 … 대부분 …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 2명이나 3명 정도를 …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 …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알지를 못합니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저임금에도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이었고 산업재해도 세계 최고였다. 즉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 성장의 원천이고 동력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