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②

연이야 2014. 4. 9. 22:31

7장 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 기본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이며 이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다. 그리고 기본 모순에서 파생하는 특수 모순(주요 모순)도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생산 경향과 이윤율 저하 경향이다. 과잉생산은 호황기에 생산을 늘리면서도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재화의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언제든 유효수요가 부족해질 수 있다. 이윤율 저하는 개별 자본가들이 불변자본에 대한 지출을 노동력에 대한 지출보다 더 빨리 늘리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과잉생산은 임금 인상, 정부 지출을 통해 상쇄할 수 있고 이윤율 저하는 임금 삭감, 착취율을 높이면 되지만 문제는 임금을 인상하면 이윤이 줄고 임금을 삭감하면 과잉생산이 심각해진다.

 

-독점 자본주의

또 다른 주요 모순은 자유경쟁에서 독점으로 바뀌는 경향이다. 이 경향으로 생산의 소유와 통제는 갈수록 소수에게 집중되고 생산과정도 더 사회화한다. 맑스, 엥겔스 이후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 독점 자본주의화 하였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독점체들과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고, 자본수출이 각별히 중요해지고 국제적 트러스트들 사이의 세계 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열강들 사이의 세계 영토 분할이 완료됐다.’ 레닌은 제국주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부분적으로 극복했지만 제국주의 전쟁으로 계급 모순이 격화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으며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을 덧붙였다.

 

-케인스주의

2차 대전 후 상대적 번영은 케인스주의덕분이며 그래서 계급 분열이 사라지고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으로 되고있다는 주장들이 휩쓸었다. 그러나 기본 모순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만 상시 군비 경제때문에 모순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냉전으로 주요 열강들이 대규모 군비 지출을 지속하자 자본은 시장에서 판매돼야 하는 재화를 적게 생산하여도 되었고 그 결과 과잉생산 경향도 상쇄됐고 이윤율 저하도 상쇄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대규모 군비 지출로 호황의 조건을 창출하였지만 느린 경제 성장률은 감수해야 했다. 반면 독일, 일본은 군비 부담을지지 않은 채 세계경제 호황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핵보유국들은 군비 지출을 낮출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이윤율 저하가 다시 시작되고 세계는 불황(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공황시에 구제 금융을 독점자본의 과잉생산 설비, 과잉생산 능력을 그대로 보존하므로 과잉은 증대되고 독점적 경쟁은 격화되고 위기는 만성화하게 된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자 착취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윤율 하락 상쇄), 과잉생산 위기를 지연시키는 신용팽창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이런 정책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와 자연의 모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관계를 맺는데 노동 소외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도 소외시킨다. 그 결과 종 멸종, 열대우림 파괴, 핵무기 위협, 오존층 파괴, 기후변화 등등 극한 위기에 도달했다. 해결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화석연료 대신 재생 가능 에너지, 자가용 중심 교통 체계를 변혁, 주택과 사무실 단열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경제 성장에 제약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의 대재앙을 막기 위해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가 실행되지 않는 이유는 자본의 이익과 상반되고 국가들 사이의 국제적 경쟁 때문에 자신만 탄소를 줄였다가 경쟁에서 밀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는 경쟁적 축적의 압력을 바탕으로 한 체제이기 때문에 이런 조처를 할 수 없다. 그리고 대재앙이 발생하더라도 인종차별, 전쟁, 독재, 파시즘을 결합해 대응할 것이다.

 

8장 인간 본성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박은 인간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악한 인간 본성에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이기적이다라는 이데올로기는 수백 년 동안 전파됐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런 본성을 통해 구원의 통로하고 이용했고 고전파 경제학자들도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가정했다. 이는 현재의 주류 경제학의 전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니체는 권력의지를 인간 본성으로 봤고 이런 관점은 엘리트의 지배로 결론 날 수밖에 없다. 나치즘, 막스 베버, 미셀 푸코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맑스는 인간의 본성은 우주 만물처럼 항상 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생계를 꾸리는 다양한 방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똑같은 사람이라도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 인간은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이타적일 수도 있다. 이 두가지 면은 사회적 조건, 특히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의존하며 자본주의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자본주의에서 경험하는 인간 본성은 실제로는 인간 본성의 소외이며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자본주의가 영원불멸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여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시키는 의도일 뿐이다.

 

9장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인가?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간의 필요와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의 조직화가 역사 이론의 출발점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 의미는 생산의 조직화가 역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존한다는 것이다. 조직화된 생산, 즉 토대는 정치, , 철학, 종교, 예술 등의 상부구조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제약하는 동시에 동력이 된다는 의미이다.

 

기계적 유물론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이 사회적 환경에 완전히 좌우되고 결정된다고 보고 인간이 역사에 개입하는 능동적 구실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차단시키는 관점이다. 대료적으로는 스피노자,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스탈린주의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기계적 유물론은 현실적으로 많은 해악을 끼쳤다.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에 엄격한 단계론에 집착, 노동계급의 투쟁이 부르주아가 용인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고 1917년에는 민주적 부르주아가 나서지 않자 그들을 대리하려 했고 10월 혁명 이후에는 볼셰비키 권력 장악이 때 이른 행동이라며 반혁명을 지지했다. 이 단계혁명론은 192527년 중국, 1936년 스페인 혁명에 적용돼 재앙적 결과를 낳았다. 또 카우츠키의 기계적 맑스주의를 표방한 독일 사민당은 의회주의적 개혁주의로 서서히 빠져들다가 급기야 전쟁(1차대전)을 지지까지 하였다. 이는 노동계급 운동의 지도자들이 관료화해서 노동계급을 얕잡아 보는 경향과 매우 비슷하다.

 

환원론

환원론은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등을 계급 억압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계급투쟁을 핵심 문제로 여기고 억압 쟁점(인종,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등)들을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한 문제로 치부

구체적 쟁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면 해결될 테니 기다리면 된다.

맑스주의는 이런 쟁점들을 무시, 제대로 된 이론적 설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구체적 억압 쟁점들이 계급 분열에서 파생된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므로 이 쟁점의 중요성을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이런 쟁점들을 무시하거 하찮게 취급한 적은 없다. 인종차별에서는 맑스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차별에 맞섰다. 여성차별에서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등 많은 저서에서 여성해방의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 대해서 맑스주의는 지금 당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억압에 맞선 저항을 언제나 옹호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은 그런 수많은 투쟁의 결합을 바탕으로 그 결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구체적 억압 쟁점에 대한 이론적 능력도 충분하다. 역사유물론에서 봤을 때 노동을 통해 동물과 구별되고 인간 자신과 역사를 창조했다는 주장은 인간은 단일한 종이라는 과학적 사실과 딱 들어맞는다. 노동 소외에서 봤을 때 인간 사이에서도 소외가 발생하는데 이는 인종차별 등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시초 축적역시 인종차별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맑스주의는 잉여가 발생하고 남성 노동의 중요성 강조되고 일부일처제로 이행하면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는 여성차별의 기원을 밝혔다. 그리고 현대에서도 여성차별이 지속되는 것은 가족제도가 노동계급 내의 분업에서 상당한 이익을 자본에게 주기 때문이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노동력의 회복, 재생산, 양성을 보증해야 하는데 경제적 단위인 가족제는 이런 필수 과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고 그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원자화한 노동계급은 낮은 임금에도 일을 하도록 내몰리고 수동성과 사회 복종에 길들여지면서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본가는 사회적 서비스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므로 정치,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

 

10장 이데올로기와 진리

관념은 현실 조건의 반영이고 대응이며 특정 시점에서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노동계급의 경험과 투쟁을 일반화한 것이다. 그런데도 객관적 관점, 중립적인 태도가 더 과학적이라고들 떠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계급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벌어지는데 중립적 태도가 가능할까? 물론 불가능하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다 자신의 입장이 있다. 정말로 중립을 지키려면 사회의 외부에서 세계의 외부에서 전체를 조망해야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관점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 자체가 그들이 존재하려면 노동자들을 계속 착취해야 하고 자본주의는 해소될 수 없는 모순 때문에 위기에 빠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영원한 체제하고 주장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은 사회 변혁에 참가하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변해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철저히 이해하는데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관점보다 우월하고 과학적이다. 이는 호모하빌리스 이래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사냥, 채집, 농경, 목축 등의 노동)이 지식의 토대였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프티부르주아 관점은 보편적 사랑, 계급 화해, 사회 개혁을 설파하는 등 가장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착각에 빠져있고 인종차별이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휩쓸리기 쉽다.

 

유물론에서 진리론의 유력한 이론은 사실이나 현실과 일치하면 진리라는 것이지만 진술이 현실과 일치하느냐 여부를 알 수 없고 감각도 오류에 빠질 수 있고 세계에 대한 참된 진술은 현실의 특정 측면이나 어느 정도까지만 현실을 반영하거나 현실과 일치한다는 난점이 있다. 그래서 맑스는 진리의 문제는 실천의 문제이고 이렇게 되었을 때 난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생명 활동으로 뇌가 생겨난다. 자연은 인간의 뇌에 반영된다. 인간은 실천과 기술을 통해 이 반영이 올바른지 검증하고 적용해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반영도 단순한 기게적 반영이 아니라 영원한 운동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는 실천적 경험을 통하여 검증되었고 이런 사례는 풍부하다. 하지만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어 인류를 해방할 능력은 아직 실천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