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③

연이야 2014. 4. 9. 22:41

11장 종교, 도덕, 정의

종교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 분석을 하면서 반종교적 비판의 기초는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종교를 만든 이유는 자기 노동으로부터, 자기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채, 비록 자신이 만들었지만 통제할 수 없고 오히려 낯선 힘으로서 자신을 지배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해서 초월적 힘이나 힘들(, 영혼, 운명 등)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상상하지만 사실 이런 초월적 힘이나 힘들은 인간의 두려움, 희망, 염원이 투사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종교의 기능을 세계를 설명하는 일반 이론이고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식 개요고 이해하기 쉬운 세계의 이치 등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종교는 사람들이 현재 상황에 타협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불행을 표현하고 이에 항의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1 그래서 맑스는 세계를 변혁해서 사람들이 더는 종교에 의지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맑스의 종교 분석에서 현대의 혁명적 실천에 대한 시사점은 진정한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종교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종교의 사회적 근원(소외, 착취, 억압)이 사라져서 종교가 점차 사멸하는 것만이 진정한 종교 폐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자는 분쟁, 충돌, 투쟁을 평가할 때 갈등의 겉으로 드러난 종교가 아니라 관련 계급과 사회 세력들을 근거로 삼는다.

 

도덕

모든 사상이 그렇듯 도덕도 인간이 역사적, 사회적 발전 과정에서 만들어 냈고 계급사회에서 도덕은 계급적 성격을 띤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장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살인하지 말라만 보더라도 그렇다. 다른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국가의 사형제도는 허용할 수 있는가? 국가가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죄는 무엇인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경찰이 살해하는 경우는? 이처럼 절대적 도덕법칙으로 제시된 규범조차 환경에 크게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전쟁, 혁명, 계급투쟁에서 적대적인 사람들은 누가 죽어 마땅한지에 대해 생각이 달랐다. 또 다른 사례로 이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2이 있는데 이는 십계명보다 더 그럴듯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적용하려 드는 순간 위와 같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맑스주의는 절대적 도덕 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런 비난을 퍼붓던 자들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자유,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전쟁이 대표적 사례이고 정치에서의 폭력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일관되려면 무기, 군대, 경찰, 감옥, 법원도 거부해야 한다. 또한 트로츠키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목적뿐이고 목적 자체도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 혁명이라는 목적 자체는 인간 해방이라는 또 다른 목적의 수단인 것이다. 계급 적대를 초월한 진정한 인간적 도덕은 계급 없는 사회에서 가능하고 <공산당 선언>에서 밝혔듯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사회이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원칙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의 주택, 교통수단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이런 일반적 특징 이상은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다.

 

12장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

루카치

루카치는 지적 편력이 시기마다 달랐기 때문에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역사와 계급의식>, <레닌-그 사상의 통일성 연구> 중심으로 요약한다. <역사와 계급의식>의 목적은 맑스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독일 사민당과 2인터내셔널의 기계적 유물론, 경제결정론을 비판, 극복 혁명적 정당에 관한 레닌주의 이론과 실천에 철학적 토대와 정당성 부여.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이 하는 구실을 탐구했는데 자본주의 경제 위기와 자본주의 붕괴의 결과로 사회주의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일절 거부한다.

 

노동자 계급 의식은 저절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데 그 배경에는 사물화이론이 있다. 사물화란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띠고 허구적 객관성이 성립되는 과정이며 이 개념의 바탕은 상품의 물신성이다. 사물화와 소외의 효과로 착취라는 현실이 은폐되고 자본주의 경제학의 법칙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조장된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으로 봐야만 사물화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사물화의 영향으로 계급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명확히 깨닫기가 어렵다. 그래서 루카치는 올바른 이론을 이용해 사회 전체를 파악할 수 있고 당원들의 적극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담지자로서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독자적 계급의식을 역사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카치는 헤겔에 대한 이해와 식견이 깊고 경제결정론과 숙명론을 비판했으며 사물화와 소외라는 주제를 복권한 점은 중요하고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루카치는 관념론이 남아 있는데 노동계급이 투쟁 과정에서 계급의식이 발전하고 당이 계급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이는 루카치가 노동계급 운동의 현실적, 감성적 활동에 오랫동안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람시

<옥중수고>는 포괄적인 저작이므로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가장 중요한 주제인 러시아 혁명 이후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혁명이 패배한 원인을 요약한다. 첫째는 러시아와 서유럽의 객관적 차이에 대한 분석, 둘째는 주관적 요인, 즉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와 정당들의 실천, 이데올로기,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경제적 지배계급은 사회를 지배할 때 무력의 요소뿐 아니라 문화, 도덕, 지적 지도의 요소인 헤게모니에도 의지하며 이 덕분에 억압적 권력뿐 아니라 동의에 의해서도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 서유럽의 부르주아는 러시아의 부르주아에 비해 훨씬 강했기 때문에 정면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강제와 동의, 귄위와 헤게모니을 결합하고 동맹 건설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동맹 건설과 지식인들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쟁취하고 유지해야 하며 유기적 지식인의 창출을 강조한다.

 

그람시는 경제결정론과 숙명론을 비판하면서 결정론의 수동성뿐 아니라 엘리트주의도 비판한다. 그리고 기계적 유물론은 현실의 역사적 인간을 근본 전제로 삼지 않는 초역사적 원리고 혁명적 실천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없게 해서 혁명적 개입과 주도력을 약화시킨다며 거부한다.

 

노동자의 현재 의식은 상식의 요소(과거에서 물려받거나 지배계급의 영향으로 형성)와 양식의 요소(실천적 경험과 행동을 바탕)로 이뤄진 복합적이고 모순된 의식이다. 따라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이 모순 사이의 균형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과 이론이 필수적이지만 양방향 관계가 되어야한다. 이런 점에서 그람시는 자발성과 지도의 변증법을 강조한다. 또한 이탈리아 혁명의 실패, 국가와 시민사회, 헤게모니, 숙명론과 경제주의 비판, 자발성과 지도의 관계에 대한 그람시의 사상은 혁명적 정당의 본질적 구실에 대한 분석으로 귀결된다.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론 읽기>에서 맑스주의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이며 인간 본성에서 출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845<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을 때는 맑스는 인식론적 단절이 일어났고 그 결과 소외론을 맑스주의에서 삭제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를 통해서 알튀세르는 절대이념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보는 헤겔의 견해와 소외된 인간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견해를 모두 거부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알튀세르는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이고 혁명은 주요 모순의 산물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다양한 모순, 요인들이 중층결정된 결과고 경제는 오직 최종심급에서만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 다양한 구조(정치, 이데올로기적 구조 등)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경제의 구실이 상당히 축소되며 경제주의, 인간주의가 2인터내셔널과 20세기 맑스주의를 괴롭힌 원죄라는 것이다.

 

인간주의/ 경제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역사에는 철학적 의미의 주체가 없고 동력, 즉 계급투쟁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생산관계보다 생산력의 구실을 폄하하기도 한다. 그리고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다시 개념화하여 인간주의와 소외를 이데올로기의 지위로 격하하였다.

 

알튀세르는 처음 등장 이래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고 이에 알튀세르는 자신의 원래 견해를 몇 차례 수정하거나 포기했다. 알튀세르는 맑스가 1845년 이후에는 소외 개념을 폐기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거부하지만 <브뤼메르 18>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스스로 선택한 상황에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또한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이라고 주장했지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들은 ... 현실의 전제들이다. 그것은 현실의 개인들, 그들의 활동, 그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다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오독이 있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점은 오독을 한 동기, 즉 스탈린주의다.

 

소외 개념과 인간주의를 반대한 근본 동기는 이 사상들의 확산이 위험하다고 보고 스탈린주의를 옹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오주의의 짝꿍으로 반쯤 인정받았는데 마오주의 정권은 철저히 스탈린주의 성격을 지녔다. 생산관계보다 생산력이 일차적 구실을 한다는 점을 폄하한 것도 마오주의와 들어맞는다.3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실천보다 철학적, 방법론적 입장을 중시하는 학술적 맑스주의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면 알튀세르는 인간을 사회구조의 단순한 담지자나 산물로 이데올로기의 포로로 환원했고 그래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기해방 프로젝트를 제약하고 위축시켰다. 또한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맑스주의로 가는 유용한 발판이 되기도 했다.

 

13장 실천철학

맑스주의의 모든 길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통하고 혁명이 일어나서 승리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노동계급 운동에 적극 참가해서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을 발전시키고 노동자들과 피억압 대중의 자신감과 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나라에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자 정당이 필요한 이유는 노동계급에게도 중앙집중적 정치조직이 필요하고 독자적 이데올로기 투쟁 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의식적이고 헌신적인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쟁취하고 투쟁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혁명은 객관적 모순에서 비롯되고 자발적으로 시작되지만 혁명의 시기에 당이 없다면 쉽게 분쇄당하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191723년 까지가 혁명적 고양기였고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이 가장 대표적 사례인데 전자는 승리했고 후자는 패배했다. 두 혁명다 자발적이었고 황제를 퇴진시켰고 때이른 무장봉기 시도가 있었고 우익 쿠데타에 성공적으로 저항했고 노동계급 다수가 권력 장악을 지지한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19177월 전면적 충돌을 막고 살아남아 훗날의 투쟁을 도모했지만 독일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이 1919년 봉기에 휩쓸리면서 걸출한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당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191710월 볼세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지만 독일에서는 192310월 공산당 지도부가 손 놓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을 흘러보내고 말았다. 결국 그 차이는 혁명 지도부의 질적 차이였다. 볼세비키는 26천 명의 당원과 14년 동안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투쟁 단계들을 거치며 전략, 전술 훈련이 잘 되어있었다. 반면 스파르타쿠스단은 규모도 작고 경험도 부족하고 조직도 느슨했고 초좌파주의 오류와 숙명론적 수동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그 이후에도 노동계급의 투쟁은 이어지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혁명적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악의 경제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고 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재앙적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고통을 겪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이런 쌍둥이 위기는 엄청난 저항을 부를 것이고 이 과정에서 긍정적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대중의 혁명적 정당을 국제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1.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의 불행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전대받는 피조물의 한숨이고, 몰인정한 세계의 인정이고 정신을 상실한 현실의 정신이다. 종교는 사람들의 아편이다.’ [본문으로]
  2.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본문으로]
  3. 중국은 낮은 생산력 수준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는 주장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