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00년부터 1940년대까지 세계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③

연이야 2016. 7. 27. 20:27

4. 스탈린주의화 (1928년부터 1930년대)

(1) 사회파시즘 - 소련내부 권력 투쟁, 우익일탈파의 패배

6차 대회에서 좌익으로의 선회가 공식화 됐고 우익일탈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본질적으로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곧 위기에 빠질 것이고 이제 막 태어나는 사회파시즘이론, 당을 좀 더 엄격한 관료주의로 통제하는 것, 노동조합에서 분파주의 전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첫 충돌은 독일 공산당에서 발생한다. 19289월에 스탈린주의 당 지도자 텔만은 금융스캔들을 숨겼다는 이유로 고소 당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텔만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베를린으로 급히 전보를 치고 ECCI 간부회는 모든 분파를 청산하라고 요구하면서 독일 공산당의 결정을 뒤엎었다. 또한 스웨덴에서는 1929년 가을에 당이 두 개로 쪼개졌고 다수파는 제명당한 우익을 따랐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수천 명이 당원을 잃고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스탈린은 자본주의가 곧 무너진다거나 외국 공산당이 성공적인 봉기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일국 사회주의와 소련의 급속한 공업화는 세계혁명에 대한 신뢰 부족을 확증한 것이었고 게다가 유럽의 혁명적 활동은 위험한 국제상황을 뒤얽히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좌익 선회를 한 것은 러시아 공산당 내 권력 투쟁과 장기적으로 소련의 안보는 엄격히 규율 잡힌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소련 방어 노력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즉 혁명을 진지하게 믿었던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진심을 러시아 공산당 내 권력투쟁과 소련 방어를 위해 이용)

 

1920년대 사민주의자가 사회파시스트가 된 이유

6차 대회에서 채택한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과업에 대한 테제’- 자본주의 안정화 모순속에서 부르주아가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사민주의를 정치구조로 흡수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한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전략은 국가기구와 자본주의 조직을 사민주의가 이끌었던 노동계급 조직의 상층부에 접목. 두 번째 전략은 반동적인 대중 운동과 공개적이고 견고한 독재를 만들기 위해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와 중간부르주아 심지어 탈계급화된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확실한 계층의 불만을 이용 자본주의 국가의 파시스트화 과정. 기본적으로 두 과정의 혼합이 사회파시즘의 이론의 바탕이다.

 

또한 19291933년 사민당의 국제 정책은 코민테른이 사회파시스트 수사를 사용할 정도로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면서 6차 대회는 좌파 사민주의 지도자를 공산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공격했다.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사회파시즘 이론은 하룻밤 사이에 도입된 것도 아니고 지난 날의 실천 과정과 관련 사민주의자들의 행동은 사회파시즘을 합법화하는 데 큰 역할(공산주의자들은 독일/영국의 개량주의 노동조합에서 추방, 사민당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와 타협적인 태도)

 

사회파시즘 전술은 부르주아 의회에 훨씬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투쟁에서 결정적 요소는 자본주의에 착취당하고 있지만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파업이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경제/정치적 지도부를 획득해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면서 노동자의 다수를 얻어 혁명적 공세를 펴는 것이다. 이 파업은 개량주의 노동조합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아래로부터의 공동 전선에 더욱 집중을 필요로 한다.

 

(2) 인민전선과 스탈린주의 테러(19341939)

인민전선의 기원

인민전선의 배경은 각국의 아래로부터의 대중행동, 코민테른 지도부의 내부 논쟁, 소비에트 외교가 변화할 필요(나치 공격에 직면해 소련의 안보 추구)가 있다는 상호작용속에서 찾아야 한다.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 프랑스/스페인에 들어섰다.

 

1933년은 나치의 권력 장악과 독일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은 코민테른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19342월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의 노동자가 파시스트 위협에 맞서 공동 파업을 성공 시킨다. 그리고 코민테른은 19345월 중순부터 정책을 선회한다.

 

인민전선 모순과 실패

1935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을 독특하고 비정상적인 국가,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국수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 요소를 지닌 노골적인 테러주의 독재로 규정한다. 하나의 부르주아 정부를 또 다른 부르주아 정부에 의한 보통의 승계가 아니라 계급 지배의 하나의 국가형식,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또 다른 형식인 노골적인 테러주의 독재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디미트로프는 농민층과 쁘띠부르주아와의 투쟁 동맹을 강조하면서 공산당은 혁명 이전의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만 인민전선 정부에 결합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반파시스트 연립 정부는 사회주의로 점진적 이행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중대한 실수이며 잘해봐야 자본주의 문제의 해결점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환상만을 드러낼 것이라고 했다.(인민전선의 모호성)

 

프랑스 사례

인민전선의 모순은 그 정책이 처음 생겨났고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 프랑스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9365월 인민전선 선거 승리는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 수상 레옹 볼룸1을 옹립하였다. 공산주의자는 세가지 중요한 성과를 냈다. 당원 충원,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 선거 성공에서 중요한 수혜자였다. 하지만 사민주의자는 노동운동에서 점증하는 공산주의자 영향과 프랑스 공산당의 선거 성적을 뚜렷이 경계하였다. 특히, 5월과 6월의 파업은 이런 경계를 한층 강화하였다.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정부가 소련이 지원했던 국제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에 적극 개입하도록 압력을 가함. 노동 계급 운동에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세우는 것이 목적. 하지만 선거 승리와 파업은 이러한 목표들이 양립할 수 없음을 부각시켰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 대중운동이 적색 위협을 되살렸다면 사민주의자 사이에 생긴 불안이 이미 흔들리고 있는 집단 안보에 대한 프랑스의 약속을 약화시켜놓을 것이기 때문이다.(코민테른 지시를 받는 프랑스 공산당이 내부로부터 강화되면서 외부의 소련과 연관된 안보 약속은 사민주의자들을 안과 밖에서 타도 대상이 됨) 따라서 모스크바는 프랑스 공산당의 예상하지 못한 승리에 급진주의자들만큼 의심하였다.

 

결국 인민전선은 러시아와 부르주아적 서구를 화해시키려고 계획되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불화를 더 키웠다. 인민전선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와의 동맹을 주저하는 정부에 동맹을 맺도록 압력을 넣을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압력과 강도가 더해지자 장래 동맹자 사이의 골은 더 깊어졌다.

 

스페인 사례

스페인 인민전선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당, 사회주의 당, 스페인 공산당과 준트로츠키주의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 당으로 이루어진 연약한 정치적 연합체이다. 그러나 19362월 인민전선은 총선에서 승리를 한다. 그 후 자발적 파업과 토지 점거는 7월 프랑코 군사 쿠데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19393월까지 내전이 이어진다.

 

히틀러와 무솔리는 반란군에 군사적 지원을 계속 제공하였다. 독일의 침공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고 두려워한 블룸은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하기로 한 인민전선 정부의 초기 결정을 뒤집고 영국과 함께 불간섭 정책 실행한다. 이는 소련을 스페인공화국에 지원하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겨놓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긴장속으로 빠뜨릴 수 있고 붉은 군대로 전면적 제국주의 전쟁에 빠뜨릴 수 있었다. 한편 프랑코가 승리한다면 집단 안보 체제는 약화되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유리한 형세를 지닐 수 있다. 그래서 몇 주의 망설임 끝에 9월말 무기를 실은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스탈린의 기본적 곤경은 장래 서구 동맹국과 적대하지 않고 또는 나치 독일과의 이미 긴장된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공화국을 최상으로 지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군수품은 공화국에 발송하지만 스페인의 소비에트화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된다2.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로 제한하도록 한 스탈린의 충고는 소련의 외교정치적 관심사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처럼 소련의 외교정치의 요구와 7차 코민테른 대회의 반파시스트 정책은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인민전선의 통일 강화하는 것이고 혁명적 요소는 철저하게 억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스페인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그들의 지역 노동자 민병대를 공산당이 통제하고 있는 유일한 공화국 군대로 통합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프랑코를 패배시키는 최상의 전망은 아래로부터 혁명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두 관점, 전쟁 우위 대 혁명 우위의 지지자들 사이의 치열한 갈등은 반파시스트 저항을 더 산산조각 나게 만들었다. 19372월에 ECCI 의장단은 스페인 공산당에게 파시즘의 간첩인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 분쇄는 승리에 꼭 필요한조건이라고 경고한다. 그 결과 19375월 카탈로니아에서의 내전 안에서 내전은 공화국 진영 내부의 격렬한 불화와 프랑코의 승리를 조장한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원조는 공화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했지만 스탈린주의적 실천은 엄청난 재앙임이 입증되었다.

 

(3) 코민테른과 테러

모스크바 전시 재판과 대테러는 1936년과 1938년 사이에 소련을 휩쓸었다. (외부적 조건)동쪽과 서쪽에서부터 침략적인 자본주의가 포위하고 있는 조건, (내부적 조건) 트로츠키주의 투쟁

 

거의 모든 당이 고통을 받았지만 가장 나쁜 영향을 받았던 당은 불법이었고 그에 따라 방어할 수 없었던 당들이었다. 독일,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핀란드, 발트연안국 공산당, 예를 들면 독일 공산당 정치국 당원들은 히틀러 치하에서 5명이 처형, 스탈린 숙청 때에는 7명이 처형, 나치가 권력을 잡자 소련으로 망명한 68명 가운데 41명이 같은 운명, 폴란드 공산당은 급기야 해산까지 당했다. 테러로 희생당한 비소련 사람은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수치는 결코 밝혀질 수 없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1422명의 외국 공산주의자가 19301953년에 총살당했다고 하지만 이는 법적인 처형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인민전선은 19389월의 뮌헨협정 후 실질적으로 죽었으며 19398월 나치-소비에트 조약에서 숨통이 끊어졌다.

 

(4)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맑스주의 혁명가라면 가장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싸울 투쟁이 있다면 당이건 인터내셔널이건 기회주의로부터 조직을 구하고 퇴행을 막는 것이다. 이는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맑스, 엥겔스의 방법이었고, 2인터내셔널의 좌파의 방법이었다. 코민테른에서도 좌파는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반혁명의 시기동안 싸웠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는 1928년 파리에서 이탈리아공산당(PCI)의 좌익분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는데, 이 대회의 목적은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도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인터내셔널에 재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이탈리아분파로서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분파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대회였다. 이들은 프로메테오(Prometeo)를 발행했는데, 당시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일국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반대했던 국제 좌익반대파에 동의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트로츠키와의 강령적 차이에 의해 1930년대부터 선을 긋게 된다.

 

한편,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는 이런 흐름이 1930년대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1933년 브뤼셀에서 좌익분파의 이론지인 빌랑을 발간한다. 빌랑의 임무는 첫째, 전쟁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러시아 혁명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등이었다.

 

1930~40년대 반혁명과 전쟁의 암흑 속에서도 진정한 이탈리아의 좌익분파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본질과 공산주의 운동의 전망을 세우는데 공헌했고, 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익분파는 단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적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국제공산당(PCint)은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에 대해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방어했고, 2차 세계대전까지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모두 그렇게 한 유일한 당이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빨치산으로부터 많은 전투 파를 얻었고 한동안 전후 이탈리아 투쟁에서 수천의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대오에 가려지고, 1921년 좌익에 의해 세워진 이탈리아 공산당과 그 주류인 보르디가의 명성에 축소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야말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로부터 직접 탄생했으며 자본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결전의 과정을 비타협적 투쟁과 혁명적 전통을 지키면서 이어오고 있다.


  1. 1936~37년에 프랑스 인민전선 내각을 이끌면서 최초의 사회당 총리를 지냈는데 최초의 유대인 출신 총리이기도 했다. 알자스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를 거쳐 소르본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1894년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그뒤 문학·연극 평론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공화주의 드레퓌스파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레옹 블룸은 1919년 처음으로 하원에 진출했다. 그는 사회당을 재건하고, 알렉상드르 밀르랑 정부와 레몽 푸앵카레 정부 시절 야당을 주도했다. 1934년 2월 파리에서 우파의 시위가 발생한 뒤 블룸은 사회당·급진당 및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과 연대를 꾀했다. 1936년 4~5월의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과반수 득표에 성공하자 그는 좌파 인민전선의 지도자로서 같은 해 6월 총리직에 취임했다. 블룸 내각은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고 주 40시간 노동제를 도입했고 유급휴가와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했으며, 주요 군수산업과 프랑스 은행을 국유화하고 사회개혁정책을 추진했다 [본문으로]
  2. 1936년 12월 21일 스탈린은 스페인 사민주의자 수상 라프고 까발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페인에서 의회주의 길이 러시아가 걸었던 혁명적 발전보다 훨씬 더 적절한 것임이 입증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