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00년부터 1940년대까지 세계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④

연이야 2016. 7. 27. 20:32

(5)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12월테제, 9월 테제, 10월 서신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12월테제의 내용은 일제의 속박에서 조선을 해방하고 토지혁명을 위한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싸움을 하려면 공산당은 필요하다. 그러나 조공은 오랫동안 파벌투쟁으로 발전을 지연시켰고 볼세비키적인 당도 조직적으로 건강한 당도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조공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공산주의 세포를 의식적이고 지속적으로 형성해야 하고 지식인 서클조직을 청산하고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세비키 대중사업을 하며 빈농을 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 12월테제는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박헌영은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유일하게 옳은 정치노선이라고 극찬하였다.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에서는 1930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9월테제> 제시한다. 이어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는 1931조선의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 비서부의 서신’<10월 서신> 발표한다. 9월테제와 10월서신은 조선의 혁명적노동조합운동과 혁명적농민조합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재건의 터를 닦는 일이 바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며 당의 진정한 볼세비키화는 적색노동조합 확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식민지 조선의 정세와 주체역량

조선사회주의자들은 대중들은 좌경화, 경제 공황으로 노동자 궁핍, 노동자 투쟁도 거세지고 있다는 낙관적 혁명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일제의 백색공포(대검거, 집회 금지, 언론 탄압, 치안 유지법 개악 등) 자산계급과 지식분자 일부분이 우경화, 민족개량주의 활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민족지상주의, 반동적 노동조합상층 일부 관료배, 사회투기주의(1928년 대검거를 전환기로 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백색테러가 극도로 잔혹 ... 대검거로 공산당의 조직역량이 매우 미약하게 되면서 모든 형태의 타락적 경향이 나타남. 전선에서 탈락하고 도피한 무리는 증가 가령 조선은 근대적 산업의 발전이 유치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숫자가 적다면서 사회주의운동의 사회적 기초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영도를 부정한다등등의 타락한 경향이 가지각색으로 나타남) 청산주의, 합법주의가 나타남 전위의 역량과 대중조직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일부는 침체기로 규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은 1929년 원산총파업 등을 주목하면서 대중이 혁명적으로 진출하지만 그런 투쟁에 전위들의 목적의식적 지도가 없고, 전위의 역량이 대중의 자발적 투쟁에 크게 못 미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 객관정세와 주체역량 사이의 틈새를 메우려면 주체 역량을 키우고 온갖 기회주의를 물리치려면 볼세비키당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재건운동

- 경성콤그룹 당재건운동(19391941)

경성콤그룹은 1930년대 초반 콤뮤니스트 그룹을 이끌며 당재건운동을 했던 박헌영이 1939년 감옥에서 나와 이관술, 김삼룡이 지도하는 그룹과 결합해서 만들어졌다. 경성콤그룹은 서울을 중심으로 함경도, 경남지역에 조직기반을 두고 있었고 식민지시대 국내운동자의 최후의 결산적 집결체이다. 해방 뒤에 재건한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의 기본핵심이며 국내파의 핵심체였다. 그리고 운동의 퇴조기에 운동을 청산하지 않은 사람들을 운동선상에 총궐기시킨 조직이다.

 

이들은 구주전쟁(2차 대전), 태평양전쟁을 처음에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으로 규정했다가 나중에는 반민주 파시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규정한다. 독소불가침조약, 소련의 폴란드 침공, 재소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해서 모두 소련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국내정세에 대해서는 나라 안팎의 객관정세는 성숙,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 1917년 러시아 방적공의 3.8데모와 같은 사건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혁명적 객관정세와 주체 역량사이에는 커다란 격차 이를 메우기 위해서 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성콤그룹은 세 번에 걸쳐 검거되면서 그룹은 와해된다. 그럼에도 각자 나름대로 활동했지만 각자 망명하고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경성콤그룹은 와해되었지만 사회주의 세력은 비록 분산되고 고립되었지만 비합법 소규모 조직 활동을 계속되었다. 특히 원산그룹의 이주하는 1943년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하기도 한다. 식민지 시절 민족주의자 및 공산주의자 중에서 한 번도 변절하지 않고 한 시도 쉬지 않고 운동을 계속한 이는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정도이다. 이는 경성콤그룹이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잡는 배경이기도 하다.

 

12월테제와 혁명론 그리고 대중작업

코민테른은 12월테제에서 조선혁명론을 제시하였다. 조선은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토지혁명을 이룩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에트를 기초로 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론은 1905년 레닌이 제시(나중에는 트로츠키입장 수용)한 것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혁명에 성공한 뒤에 사회주의로 가는 디딤돌을 놓는 정부를 의미한다. 이에 조선의 사회주의자들 역시 1920년 중후반 노선에서 벗어나 인민공화국을 건설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주의자들에 혼란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 사이에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조선의 혁명은 직접프롤레타리아독재로 갈 것인가, 독립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친 뒤에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나가는 2단계 혁명으로 갈 것인가가 관심거리였다.

 

당재건운동가들은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를 소비에트 형태로 이룩하려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과정을 밟아서 소비에트를 만들려 했을까? 노동 민주주의 독재정권은 노농 소비에트의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는 노농대중을 가장 광범하게 포섭할 수 있는 대중조직이며 노농대중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지도를 가장 용이하게 하며 혁명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힘 있게 싸울 수 있는 권력조직이며 대중 자신의 가장 민주주의적인 따라서 가장 권위 있는 조직으로서 노농대중이 새로운 국가 건설과 관리에 쉽게 참가하게 하며 인민의 소수인 착취자를 가장 잘 억압할 수 있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당재건운동가들은 파업위원회, 공장위원회, 혁명적 공장위원회, 공장대표회의, 실업자위원회 같은 것이 소비에트의 싹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비에트는 혁명의 시기가 되어야만 조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제의 수사망 앞에서 끝내 현실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혁명론과 인민전선

인민전선론 수용

조선의 당재건운동가들은 인민전선을 조선에 어떻게 적용하려 했을까?

1930년대 초반 좌선회에 익숙했던 조선 사회주의자들로서는 코민테른 7차대회 -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급격한 변화였다. 이번에도 많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새로운 노선을 수용했지만 모두가 인민전선론을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이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전국전 통일 지도부가 없는 점, 1937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은 수많은 활동가를 사회주의진영에서 떼어냈고 코민테른과 국제조직에서 활동했던 거의 모든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탄압받으면서 코민테른과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코민테른 7차대회(반파시즘 인민전선)은 몇 가지 풀기 힘든 문제도 있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통일전선을 기초로 광범한 반파시즘 인민전선 결성이라고 했을 때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의 관계가 모호 둘째,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 셋째,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호 넷째, 평화를 위한 투쟁과 혁명적 패배주의(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전환) 관계 모호. 그렇다면 현실 정치에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프롤레타리아통일전선은 사라지고 인민전선만 남았다 프로핀테른 해산 인민전선정부는 의회제 민주공화국 권력 형태의 정부로서 노동자투쟁을 가라앉히는 진통제였고 공화정과 일정한 형태의 민주주의 정권만을 위해서 모인 세력을 묶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음 혁명적 패배주의를 완전히 거두어 들인다. 결국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재유 그룹의 혁명론과 인민전선

코민테른 7차 대회는 승인했지만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정부 수립을 당면 혁명의 중심 강령으로 내걸었다. 눈앞에 닥친 혁명이 사회주의로 전화경향을 가진 민족혁명이며 민족혁명운동에서 공산주의운동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하고 농업혁명과 민족혁명을 프롤레타리아가 앞장서 승리한다면 그것이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정부라고 결론을 내린다. , 이재유그룹은 인민전선을 반전운동에 활용할 전술로 받아들였고 그 전술은 어디까지나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정부 건설이라는 전략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원산그룹의 혁명론과 인민전선

원산그룹은 처음에는 인민전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지도부를 확대, 개편하면서 전술을 일부 바꾸기 시작했다. 일상투쟁에서 민족부르주아까지도 일제 타도 투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하고 소부르주아, 인텔리겐차, 애국적 민족부르주아 일부까지도 포함한 광범한 인민층을 끌어 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원산그룹은 인민전선을 광범한 통일전선전술로 여겼을 따름이다. 국제조직은 193712월에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을 해체했지만 원산그룹은 적색노동조합운동을 계속하였고 대중 봉기를 목적으로 삼는 한 소비에트 말고는 다른 조직을 떠올릴 수 없었다. 가령 코민테른 7차대회는 평화를 위한 투쟁을 주장했지만 원산그룹은 일관되게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환시키자는 슬로건 또한 인민전선정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정권 수립 혹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전 인민의 정권인 소비에트정권 수립을 내세웠다.

 

경성콤그룹의 혁명론과 인민전선

경성콤그룹은 일부가 인민전선을 주장했더라도 노동 소비에트 범주안에 있었다. 박헌영은 인민전선을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을 허용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민족주의그룹, 특히 대중이 있는 종교계의 반제, 반전그룹과 공동투쟁강령에 따라 위로부터 통일전선을 하는 방식, 도시 소부르주아 지식인을 중심으로 소부르주아적 대중조직을 만들고 노동 대중조직과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본질은 노동자 중심성과 계급해방을 해체하고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단순한 논리이다. 경성콤그룹이 노동자, 농민의 민주독재를 주장하는 한 인민전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두 노선의 공존

당재건운동가들은 코민테른 7차 대회 노선을 수용했음에도 인민전선과 다르게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를 유지했다 이유는 식민지조선의 혹독한 비합법 상황에서 광범한 동맹을 맺기 어려웠다. 조선 사회주의자들마저 전략이나 전술을 체계적으로 구사할 주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대중봉기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대중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 소비에트도 포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기초가 될 여러 위원회를 만들려면 반드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나 혁명적농민조합운동을 해야만 했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그야말로 하나의 전선으로만 생각하였다.

 

(6)김일성과 만주항일무장투쟁 그리고 조선공작단

김일성은 1932년 봄 안투에서 구국군 유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19332월 왕칭유격대에 합류하여 정치위원이 된다. 하지만 19335월부터 시작된 반민생단 투쟁1에는 500여명의 조선인이 총살된 것으로 증언">으로 해임된다. 하지만 1935년 왕칭으로 돌아온 후 정치위원으로 부활한다.

 

그 후 동북항일연군22군 결성되어 김일성은 제3사 사장에 임명된다. 다른 한편 무장조직과는 별도로 반일단체를 민족별로 조직하기로 해서 재만한인 조국광복회도 탄생하였다. 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구체적으로 전개한 것은 김일성 부대이다. 이들은 백두산 남쪽 갑산군의 공산주의자와 연락이 닿아 거기에도 조직 만들었다. 그리고 193764일 보천보를 공격3한다.

 

193910월부터 일본군은 동남부 치안숙청공작이라는 토벌작전 개시한다. 그 결과 제1로군 총사령 양 징유 사살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 부대는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하지만 토벌부대인 마에다중대의 추격을 받는다. 김일성부대는 생쌀을 씹고 눈을 녹여 마시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한계에 이르자 매복 후 반격으로 마에다중대를 전멸시킨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1로군 최고지도자 웨이 정민은 부상자와 연장자를 소련 영내로 보내고 남은 대원은 소부대로 나누어 식량공작에 투입한다는 방침을 소련에 보고한다. 이 방침을 접한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소련 영내로 들어갈 결단을 한다. 이는 비조직적, 비당적 행동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합리적 결정이 된다.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하자 소련은 대일전에 대비 항일유격대원들에게 훈련을 실시할 계획을 작성한다. 이에 19428월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소련 나나이족 부대와 함께 적군 제88특별저격여단으로 편성된다.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은 88특별여단 조선인 지도자 중 최고위급이다.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보다 거의 열 살 연상이었고 투쟁 경력, 당력에서도 고참이다. 그러나 북만주에서 활동했던 최용건과 김책은 조선내에서 거의 무명이지만 동남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진공작전을 펼친 김일성은 이름면에서 이들과 비교가 되지않는다.4

 

19457월 소련측으로부터 대일전쟁을 대비해 정보요원 차출을 요청한다. 그리고 부대원 상당수가 투입된다. 그러자 항일연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각각 만주와 조선에 투입 방침을 세운다. 이 가운데 조선으로 투입되는 조직이 조선공작단이다. 단원으로는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 서철, 김일, 최현 등이 선발된다. 조선공작단은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데 구심체가 될 조직이며 당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중국공산당 조선공작단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 그룹은 95일 하바로프스크를 출발하여 919일 원산에 상륙한다.

 

김일성이 해방 후 북한에서의 초기 활동은 김일성의 만주파와 국내파의 힘겨루기 시기였다. 특히, 외곽단체의 조직노선은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김일성은 공산당과 외곽단체의 조직노선을 대중노선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내파는 계급성을 엄격히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김일성은 소수의 공청 청년들만으로는 북조선의 소비에트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문도 좁고 기반도 취약한 공청을 해체하고 조직을 넓혀 들어오고 싶은 청년은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북조선민주청년동맹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이에 국내파는 민청을 만들더라도 당의 핵심 조직인 공청은 그대로 두자. 아니면 조선민주당의 최용건 부위원장 주도로 청년조직을 만들어 공청과 민주당의 청년조직이 연합해 공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전술로 가자고 주장한다. 해방 후 북한에서 만주파와 국내파간의 논쟁은 결국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과 단절된 토착 공산주의자와 스탈린주의 이견이며 최종 승자는 스탈린주의를 등에 업은 김일성이다.

 

5. 2차 세계대전과 코민테른의 운명 - 전쟁에서 해산까지 19391943

나치-소비에트 조약과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코민테른 해산

1939823일 나치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불가침 조약으로 코민테른의 정책 선회는 분명했다. 공개적인 반파시스트 선전선동을 피하고 교전 중인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어떤 지지도 포기하고 영-프 제국주의의 특수한 위험이 선전에서 전면으로 등장한다. 코민테른의 정책 선회는 새로운 독일 동맹자를 적대하지 않고 히틀러에게 조약을 위반할 핑계를 주지 않으려는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나왔다. 이는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은 소련의 직접적인 외교적 이해에 종속 코민테른은 스탈린주의적 소련 지도부에 의존 및 종속을 나타낸다. 하지만 1941622일 소련에 대한 나치의 침공(바바로사 작전)으로 또 한번의 선회가 나타난다.

 

코민테른 해산은 소련 지도부 특히 스탈린의 최종 결정으로 내려졌다. 공식적인 이유는 이미 전쟁이 터지기 전에 여러 국가의 운동이 맞닥트린 문제를 푸는 데 어려운 장애를 만나곤 했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다.’ 따라서 코민테른 1차 대회가 택했던 노동자를 단결시키는 조직적 형식은 각국의 노동계급 당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것을 지연시키게 되었다게다가 세계대전은 개별국가의 상황에서 차이를 더욱 예리하게 했다.’ 이다. 하지만 실질적 이유는 반히틀러 동맹에서 연합국과의 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한 소련의 외교적 필요에 의해 결정되었다.

 

6. 나가며

본문에서 고찰했듯이 맑스주의 원칙을 포기한 순간 코민테른은 더 이상 국제 노동자계급의 무기가 될 수 없었다. 결국 혁명운동은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해야 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혁명적 원칙으로 주·객관적 정세 판단과 실천을 해야 한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역사를 봤을 때 원칙의 포기보다 혁명의 포기가 결국은 무원칙으로 나타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계 노동계급의 혁명에 대한 열정을 소비에트 러시아 이익에 종속시켰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지침을 기계적으로 따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잠시나마 코민테른과의 관계 단절속에서 인민전선을 각 그룹의 수준에서 수용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선배 활동가들의 저작을 편의적으로 암송, 인용하여 교조로 수용하거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절대적 언명으로 전략전술을 이해하는 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결국 지역, 민족, 국가를 넘어 세계운동과의 관계속에서 한국노동운동사에 접근했을 때, 모든 운동세력의 평가가 가능하고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복원하고 알리는 것은 사회주의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모두에게 중요한 의무이다. 특히나 운동의 수세기적 상황에서는 더욱 필요하다. 더욱이 혁명운동의 역사와 실천이 일천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중요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맑스주의의 탈을 쓴 스탈린주의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폭넓은 역사적 성찰을 가로막고 스탈린주의의 옹호가 마치 반혁명 운동에 대한 투쟁의 푯대인 것처럼 착각하는 풍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1. 반민생단 투쟁이란 조선인 당간부, 부대간부가 잇달아 일본이 꾸며낸 모략단체 민생단 단원으로 몰려 구속 처형되었던 사건-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사료 하 [본문으로]
  2. 1935년 제7차 코민테른의 인민전선에 따라 설립된 만주지역 항일무장운동 단체로 만주지역 모든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하여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1936년 창설. 중국인과 조선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었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정권 수립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처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에,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에,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된다. 동북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의 상당수는 1941년까지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1942년까지, 전사·귀순하고 있지 않는 구성원들도 소련으로 탈출하였으므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본문으로]
  3. 보천보는 산중의 작은 마을이지만 이웃에 혜산진이 있어 이곳을 통해 전국에 알려짐. 즉 뛰어난 선전효과를 거둘수 있다는 점에서 절호의 공격대상지였다 [본문으로]
  4.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정한 이유. 조선을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 코민테른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대부분은 1930년대 일본 스파이라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3년 동안 소련군 제88정찰여단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소련 명령에 충실. 특히, 코민테른과 연결돼 활동한 전력이 없고 빨치산 투쟁만 하고 종파에 특별히 관여한 적이 없는 점에 호감을 느낌. 조선에서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도 용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