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00년부터 1940년대까지 세계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①

연이야 2016. 7. 27. 19:41



1. 들어가며

세계사회주의운동과 한국노동운동사 혹은 한국사회주의운동은 개별적 범주로는 많은 자료가 있다. 아니면 한국노동운동사 혹은 한국사회주의운동을 다루는 내용에서 부분적으로 세계사회주의운동과 관련지어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강좌의 주된 목적은 세계사회주의운동이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운동을 했는지 직접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국사회주의는 구소련의 사례에서 보듯이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미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원칙을 천명하였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식민지시대 사회주의자들은 세계사적 관계속에서 활동을 하였고 그런 연결고리는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또한 해방 후에도 많은 영향을 한반도에 미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주의운동을 제대로 고찰하고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세계사회주의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을 직접적으로 고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190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모든 부분을 다루는 데는 본인의 역량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제2인터내셔널 반전논쟁 및 코민테른 탄생 배경, 노동자공동전선1, 인민전선과 각 전술이 중국과 조선에 어떤 영향력과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2.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1900년대1910년대 후반)

- 2인터내셔널의 개량주의를 넘어

(1) 2인터내셔널(사회주의 인터내셔널, 1889~1914)

2인터내셔널에서는 수정주의 논쟁, 총파업 논쟁, 반전 논쟁, 식민지 논쟁을 통해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로 갈라진 시기이다. 여기서는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로 갈라진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반전 논쟁만 다루겠다.

반전 논쟁

19세기말 20세기초의 상황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다른 제국주주의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변절된다. 아무튼 반전 논쟁은 독일 사민당처럼 전통적인 방어 전쟁의 논리를 주장하면서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측과 총파업 등의 수단을 사용해서 공세적으로 전쟁 시도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측으로 나뉜다.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계급적 입장에서 민족 전쟁의 문제에 대해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2인터내셔널의 주요 당들은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 열기에 휩쓸리며 자신들의 기회주의 본색(전쟁 찬성)을 드러냈고, 결국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는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까지 하였다.

 

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노동자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의 당들과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혁명그룹인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2) 3인터내셔널 탄생 배경

1915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침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4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침머발트 대회는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침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레닌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라고 선언하고,‘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하지만 침머발트 좌파는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전쟁을 내전으로)은 현실이 되었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그들의 원칙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아무튼 1차 대전을 계기로 전쟁 찬성측은 서유럽 중심의 사민주의로, 제국주의 전쟁 반대 측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완전히 나뉘어진다. 즉 서유럽 사민주의 기원은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했거나 적어도 승인, 방관했던 세력이다.

 

3. 코민테른2(3인터내셔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볼세비키화(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1) 레닌 시기의 코민테른(19191923)

노동자 공동전선

1921년 레닌은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더는 의제가 아니고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서 일시적인 휴식이 필요했다고 인식했다. 이런 배경에서 노동자 공동전선이 제시되었다. 자본주의 공세에 맞서 사민당의 평당원과 함께 벌이는 공동의 방어 투쟁으로 공산주의를 대중화하고 개량주의 지도자의 위선을 폭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일정한 조건에서 개량주의 지도자들과 일시적인 동맹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정책은 여러 공산당에서 거센 반대에 부딪쳤지만 코민테른은 192112월에서 1928년까지 공식적으로 공동전선을 실천했다.

 

공동전선의 중요한 함의

신경제정책을 통한 소비에트 재건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상업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1921년 초 내전에서 승리한 볼세비키는 국가 재건설과 오랫동안 고통을 참아온 농민/노동자를 유화시켜야 했고 따라서 자본주의와 경제 교역은 꼭 해야 할 일)하였다. , 1921년 이전에는 혁명적 공세 이론은 소비에트 국가 이익과 맞닿아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차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차츰 소비에트국가와 교역을 하는 부르주아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조직인 코민테른의 혁명적 사명보다는 외무인민위원회의 외교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의 분수령은 19213월이다. 독일 3월 행동3이 처참하게 실패, 소비에트 러시아에 네프4 도입, 영국과 소련의 무역협정이다. 대표적 사례가 19224월 바이마르 독일과 러시아사이에 체결된 라팔로 조약5이다. 라팔로조약의 비밀 규정 아래 베르사유평화조약에 따라 심각하게 축소된 독일군대는 군사적, 경제적 양보를 한 대가로 러시아 땅에서 군대를 다시 추스르고 현대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독일공산당은 공산주의자에게 발포하는 소비에트가 지원하는 독일육군이라는 유령과 맞닥트리게 되었다.6

 

노동자공동전선의 문제점

많은 공산당들이 공동전선에 반대했고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공산당의 반대가 심했다. 각각의 환경에 새로운 전술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인식했다. 프랑스공산당은 프랑스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전선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노동조합영역에서만 공동전술을 수용했다.

 

사민주의자들과의 행동 통일은 훨씬 복잡하였다. 우익주의의 개량주의 조직과 위로부터의 조직적 통일 경향과 일반 당원들을 그들의 지도자에 맞서도록 아래로부터 교묘하고 철저한 호소사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자에 이르는 정확한 길은 애매모호하였다. 1921년 창립된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7은 공동전선의 채택과 함께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혁명적 노조주의자들이 기존의 개량주의 조직에서 조합원 다수를 얻을 수 있게 활동하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적 소수로 독자적인 적색노동조합을 세워야 하는가? 는 명확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조합 사례는 이런 불명확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로핀테른 노선은 혁명의 대의에 조합원 다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개량주의 노동조합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개량주의 지도부는 1922년 친프로핀테른 활동가들을 쫓아냈다. 이에 혁명적 그룹은 적색 노동조합 창립대회를 열었고 1923년에는 16만 명의 조합원을 확보,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공동전선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럽 노동조합주의자 다수를 얻는 데 실패를 주었다.

 

(2) 코민테른의 볼세비키화와 일국사회주의

독일에서 192310월이 대실패로 끝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이 강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안정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코민테른을 위기로 빠뜨렸다. 유럽에서 혁명은 좌절되었고 소련은 고립되었으며 1924년 레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볼세비키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위로부터의 볼세비키화와 일국사회주의의 함의

볼세비키화란? 러시아가 코민테른과 그 회원 공산당을 지배하려는 경향이며 특수하게는 ECCI(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에 있는 러시아 공산당 대표의 손아귀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스탈린은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 국제무대 모두에서 그의 반대파를 패배시켰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코민테른과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요새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점점 소비에트 국가 이익은 코민테른의 기본 사명인 세계혁명보다 우선하였다.

 

위로부터의 볼세비키화의 직접적인 뿌리를 들춰내려면 독일의 10월 혁명이 실패한 뒤 잇달아 터진 사건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3인조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당내 투쟁도 한 몫하고 있다. 3인조는 독일 10월 혁명에서 우익일탈파(트로츠키를 가리킴)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해서 좌파로의 선회가 코민테른에 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독일 공산당이 볼세비키처럼 행동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4675차대회에서는 볼세비키화 슬로건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다. 볼세비키화의 구체적 내용은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러시아 공산당 다수파에 충성하는 엄격히 중앙집중화되고 규율 잡힌 레닌주의 조직을 창조하는 것이다. 볼세비키화와 트로츠키에 맞선 투쟁은 서로 협력적인 것이다. 5차 대회에서 채택 된 전술에 대한 테제는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라테크와 브란들러를 사민주의와 유기적 동맹을 맺은 것으로 해석하면서 공동전선을 왜곡하려고 애썼던 트로츠키와 함께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독일 혁명의 사민주의 배신자와 그들의 러시아 동맹 트로츠키, 라테크 모두를 폭로하는 수단으로 공동전선을 좌익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대회는 위로부터의 공동전선만을 창조하는 것을 명확히 거절했다. 또 사민주의자가 지배하고 있었던 노동조합과 다른 노동계급 조직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펴는 것이 대중적인 공산당을 세우는 방법이라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공동전선은 혼란의 근원이었고 좌우익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다. 우익은 아래로부터 공동전선이 당을 노동계급 운동안의 단순한 종파로 축소시킨다고 비판했다. 좌익은 사민주의는 태생부터 반혁명적이고 개량주의 조직안에서 선동은 시간 낭비라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는 독자적인 적색 노동조합 창설 계획이다.

 

또한 1924년은 일국사회주의 교의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스탈린은 그 교의의 레닌주의 기원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세계혁명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레닌의 가정에서 시작한 스탈린은 혁명적 봉기의 조류가 일시적으로 빠져나갔고 혁명을 성공시킨 유일한 국가인 소련은 그 자체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보루였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공격에서 보호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의 주된 과업은 혁명적 봉기를 조급하게 추진하는게 아니라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의 혁명적 사명이 소비에트 국가와 이익에 종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일국사회주의 또다른 함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네프는 경제의 안정화를 촉진했고 자본주의와 일시적인 평형상태가 있었다. 이 환경에서 소비에트 국가에 필요한 것은 제국주의 간섭과 위협에서 벗어나 오랜 안정이며 따라서 평화공존은 필요했다. 스탈린은 평화공존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소비에트 국가를 방어할 의무에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지금까지는 United Front를 통일전선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통일전선은 자칫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하나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술은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조직적 통일이 아니라 공동으로 활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전선이 더 적합한 개념이다 [본문으로]
  2. ※ 코민테른 세계대회 일정 1차 대회 - 모스크바, 1919년 3월2일∼6일 2차 대회 -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 1920년 7월19일∼8월7일 3차 대회 - 모스크바 1921년 6월22일∼7월12일 : 노동자 공동전선 4차 대회 -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 1922년 11월5일∼12월5일 1924년 1월 레닌 사망 5차 대회 - 모스크바 1924년 6월17일∼7월8일 6차 대회 - 모스크바 1928년 7월17일∼9월1일 : 좌익선회(사회파시즘) 7차 대회 - 모스크바 1935년 7월25일∼8월21일 : 인민전선 [본문으로]
  3. 독일공산당은 1920년 12월 독립사민당 좌파와 통합당대회를 열고 독일통합공산당(당원 50만 명)을 창당한다. 3월 중순 사민당의 프로이센 주장관인 회르징(Horsing)은 비공인 파업,약탈, 강도 테러와 기타 불법 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해당 지역으로 경찰을 파견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회르징은 부활절 기간이라서 노동자들이 방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반면 공산당 지도부 대다수는 당세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항상 방어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공산당은 무력충돌을 전국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혁명적 공세(봉기)로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기로 했다. 공산당은 중부 독일전체에 총파업과 노동자들에게 무장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총파업은 일어나지 않았고 항의파업조차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러자 공산당은 비당원이며 혁명적 모험가로 불리며 지극히 개인주의 성향을 가진 막스 횔쯔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국가는 군대가 아닌 경찰만으로 횔쯔의 군대를 충분히 진압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파업 가담자와 파업 반대자 노동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공산당은 몇 주도 안 되어 약 20만 명의 당원을 잃었다. 또한 구 독립사민당의 두 분파 사이에서 주저하던 수십만의 노동자들로부터 외면까지 받았다. 그리고 파울 레비(Paul Levi)를 포함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제명되었다. 코민테른 3차대회에서는 3월 행동에 대해 공세이론을 비난함과 동시에 1922년에는 노동자공동전선을 내놓게 된다. [본문으로]
  4. 네프(신경제정책)은 1921년 3월 10차 당 대회에서 강제 징발을 그만두고 수확량의 백분율로 산정된 현물세 도입으로 시작된 조치. 농민경제, 상업회계에 종속된 국영부문, 사영상공업, 국가와 협동조합의 조달/배분 조직망, 신용대부체계, 초보적인 자본 시장들을 결합해 진화하던 혼성 체계 [본문으로]
  5. 소련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외채승인 문제로 불만, 이에 프랑스는 소련의 배상금으로 과거의 채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독일은 소련의 막대한 시장과 재군비를 위해, 소련역시 경제건설를 위해 교섭을 원했다. [본문으로]
  6. 실제로 코민테른의 영감을 받은 1923년 10월 혁명에서 독일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발포를 했다. [본문으로]
  7. 1921년 7월 모스크바에서 창립대회. 목적은 ‘국제 노동조합운동의 모든 혁명세력을 단결시키고 제국주의 부르주아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안에 있는 부르주아 앞잡이들에 반대하는 투쟁의 지도자, 조직자 그리고 활동의 조정자가 될 노동조합 중앙을 만드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