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00년부터 1940년대까지 세계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②

연이야 2016. 7. 27. 19:52

(3) 공동전선과 중국 공산주의 운동

1차 공동전선(1차 국공합작, 1924. 1 1927. 7)

1920년대 중반부터 코민테른 목표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순종은 모스크바에서 훈련받은 중국인 간부 세대가 초기 지도부를 대체함으로써 확보하였다. 대표적 인물이 취추바이, 왕밍1 등이다. 결국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 볼세비키 형태의 당 규율과 이데올로기의 준거를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모스크바 지부 출신의 귀환자에 의해 19271935년 사이에 당에서 권위를 강탈하면서였다.

 

19228ECCI는 국민당 우위의 공동전선에 전념하라고 중국 공산당에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하였다. , 중국에서 가장 직접적인 목표(민족 독립과 통일)는 국민당 강령의 이행을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ECCI는 국민당을 중국에서 혁명적 변화의 근본 원천으로 여겼다. 또한 민족주의자와 부르주아가 지배했던 국민당이 볼세비키 이데올로기와 조직화에 복종하는 혁명의 연합체로서 여겼다. 중국 공산당의 관점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분화의 결과로서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도전할 수 있는 대중정당으로 나타날 때까지 전술적 독립은 공동전선에서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국민당의 초기 승리에 결정적 요소를 준 것은 황포군관학교였다. 황포군관학교는 볼세비키 교의와 조직 이론을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에 전달하는 통로였다. 결국 19231927년에 중국에서 볼세비키화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에게 이용될 수 있는 계급 중립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조직적 수준에서 공통의 지형을 이용했다.

 

아무튼 중국에서 공동전선의 처음 수익자는 1925530일 운동2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중국 공산당이었다. 이에 중국에서 가장 훈련이 잘된 군대를 통솔하는 국민당 우익 장제스는 3월에 군부대에 배속된 모든 정치인민위원 체포, 소비에트 고문 감금, 파업 위원회를 해산시킨다. 그럼에도 코민테른은 못 본 체했고 심지어 5월에 모든 고위 관직에서 공산주의자 축출 지시하고 공산당의 능력을 축소시켰을 때도 대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코민테른의 중국에서 정책은 서방 강대국 및 일본과 평화 공존은 소비에트의 필요성과 숨 쉴 공간을 의미하였다.

 

국민당에는 두 개의 군대가 있었다. 왕징웨이가 통제하는 군대 - 무한에서 북쪽으로 이동, 장제스가 통제하는 군대 - 상하이가 목표 보로딘과 중국 주재 소비에트 군사절단 갈렌 장군의 반대로 상하이 작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코민테른의 동맹자로서 지위를 확인하고 소비에트 전쟁 물자를 계속 끌어들이고 중국 공산당 지지를 확보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19272월 장제스 군대가 상하이 외곽에 다다르자 본색이 드러났다.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가 도시로 들어오는 것을 막자고 호소했지만 코민테른은 파업자에게 국민당 군대와 갈등을 피하고 무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탓에 장제스 군대가 4월에 상하이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어떠한 군사적 반대에도 부닥치지 않았다. 그리고 장제스는 공동전선을 폐기하고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 대량학살이 잇따랐고 첫 공동전선은 재앙적임이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5월에 열린 ECCI 총회에서 중국 공산당은 공동전선의 틀을 유지하는 초안을 제출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트로츠키와 투쟁에서 스탈린을 고립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 하지만 중국 공산당에 맞서 7월말에는 무한정부, 장제스, 기독교군벌 등의 세력이 새로운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ECCI는 중국 공산당 당원에게 무한정부에서 사퇴하라고 했지만 국민당에는 남아 있으라고 했다.

 

1927년 대패배는 코민테른이 중국 대중의 민족주의 감정, 프롤레타리아의 상대적 취약성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부분과 중국 공산당이 농촌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마디로 1920년대 중반 중국은 식민지/반식민지에서 스탈린의 혁명 이론을 위한 시험대로서 반제 반봉건 투쟁에서 민족 부르주아에게 중심적 역할을 배반당했던 경험이었다.

 

붉은 매판의 등장과 마오주의

19286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천두슈는 국민당을 반대하지 못한 우익으로 취추바이는 광저우 봉기에서 드러난 맹목적인 행동주의 때문에 비난 받았다. 리리싼은 선출되지 않은 총서기이지만 1930년까지 당 위원회에서 지배적인 인물로서 도시 기반을 다시 복원하는데 책임자역할을 한다. 하지만 리리싼은 실패하였고 도시 통제를 믿지 않았던 마오는 농민층을 조직하려는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 후 모스크바에서 훈련을 받고 헌신적인 스탈린주의자인 왕밍은 이 시기 당의 볼세비키화의 지휘자로서 중국을 거의 방문하지 않고도 중국 공산당에서 권력을 잡았다. 왕밍과 같이 권력을 잡았던 세력역시 전형적인 붉은 매판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 공산당을 지배하고 통제하였다.

 

마오주의

1928년부터 노동자는 더 이상 집단으로 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당이 더 이상 공산주의당이 아닐 때 적군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농민과 룸펜프롤레타리가 당에 들어왔다. 19287월 프롤레타리아 당원 비율은 10%였고 15개월 후에는 3%였다. 그리고 대장정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제국주의적이고 혁명적 서사시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질적 목적은 십여 곳에서 흩어져 대지주와 투쟁하던 농민 게릴라 세력을 전쟁을 수행할 정규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또한 전설은 대장정이 마오에 의해 고무되고 이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마오는 와병중이었고 대장정을 준비하는 동안 왕밍의 분파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마오에게 애국주의와 국제주의는 동일하다.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는 또한 애국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애국자이며 우리의 표어는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공격자에 대항하는 투쟁이다마오는 디미트로프의 연설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민족적 형식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의 구원이 될 것이다를 반복했을 뿐이다.

 

(4) 1920년대 조선사회주의 운동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조선인들에게 사회주의는 일본, 중국, 러시아를 통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1919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퍼졌다. 최초의 당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19184월 창립되었다. 그리고 19201월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4이 창립되는데 이들은 19215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변혁론은 궁극적으로 코민테른의 민족 식민지문제에 대한 인식에 규정받았다. 하지만 공동전선문제에 대한 입장에서는 차이가 존재하였다. 이르쿠츠크파는 사회주의혁명론에 입각한 소비에트 건설론, 상해파는 민족해방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 전화한다는 입장이다. 상해파는 문화운동론자(민족개량주의자)까지도 포함하였으나 이르쿠츠크파는 이들에 대한 고립정책을 취하였다. 결국 양파의 통합을 위한 베르흐네우진스크 대회의 실패는 정치사상적 공통성의 취약함이 원인이었다. 급기야 19216월 자유시사변5으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은 무력충돌로까지 확대되었다.

 

조선공산당 창건과 분파투쟁

1차당대회와 강령문제(1차 조공 1925. 4 11)

1925417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서울에 소재하는 7개 세포 단체와 지방 각지의 10개 세포 단체에서 파견된 19명이 모였다. 당 규약 채택, 중요 정책안 가결, 7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 선출을 하였다. 19267월자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의 이름으로 조선공산당선언이라는 강령적 문헌에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를 내용으로 하는 최소강령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민족혁명유일전선을 위해 전민족의 87%를 구성하는 노동자 농민계급과 도시소부르주아, 지식인 및 부르주아의 연합을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1차 조공은 192511월 신의주사건으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검거를 면한 화요파는 그해 12월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여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코민테른 가입과 분파투쟁 그리고 코민테른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와 조선공산당의 공통점은 코민테른 가입을 추진한 점이다. 코민테른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연대감과 일체감을 갖게 된 데는 코민테른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식민지 인민의 해방투쟁을 지지, 인류의 보편적 해방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민테른에 가입하면 코민테른과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정치/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코민테른 세계대회와 각급 기관에 대표를 파견할 권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비롯한 각종 고등교육기관에 유학생 파견의 권리도 있었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 가입을 위해서 조동호와 조봉암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조동호는 중간에 상해에서 체류하고 이듬해 모스크바로 가고 1925년에는 조봉암만 간다. 모스크바에서는 조훈과 남만춘6이 통역을 도왔다. 코민테른내 조선문제를 취급하는 동방부는 1925년 당시 6인의 위원들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보이틴스키, 바실리예프 등 보이틴스키그룹7은 조선 공산주의운동 내부의 여러 세력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192123년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사이의 분쟁과 대립에서 후자를 지지함으로써 초창기 조선 사회주의운동에 내분을 가져온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1923년 하반기에 이르쿠츠크파 공산 그룹은 국민의회 그룹과 원조 이르쿠츠크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이에 보이틴스키 그룹은 조선 내지에 대중적 기반을 가진 공산 그룹을 기반으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중심기관을 결성하겠다는 입장(조선 내지 중심론)을 천명한다. 이에 따라 화요파 그룹이 새로운 파트너로 떠올랐다. 여기에 국민의회 그룹은 반대했지만 구이르쿠츠크 그룹8은 독립적인 공산 그룹을 해체하고 화요파 조직에 합류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것이 비주류 공산주의자들이 비난하던 보이틴스키 - 남만춘 밀약의 실체이다.

 

19259월결정서

모스크바에 도착한 조봉암은 결정적으로 당창립대회가 개최되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빙이 없었다. , 강령, 규약, 정책을 담은 결정 같은 문건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또한 강령과 관련하여 조선 혁명을 성공시킨 뒤에는 소련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공화국9을 건설 주장하였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은 지금 소비에트 정권 슬로건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요구함으로써 광범한 노동자, 농민 대중을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유는 조선은 농민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조직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사업의 목표는 민족혁명이어야 하고 그래서 대중적인 민족통일전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 중국 국민당을 참고할 것을 권고하였다.

 

결국 바실리예프가 작성한 조선문제결정서 초안은 동방부/ 미츠케비치위원회 논의와 수정을 거처 코민테른 간부회는 921일 결정서를 채택했다. 9월결정서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여부를 강령, 규약, 정책을 담은 결정 같은 문건이 도착할 때까지 승인은 연기되지만 조선공산단체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를 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즉 사실상의 승인이며 이를 조선공산당원들은 잠정 승인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뷰로(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를 해산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때까지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인정했던 당준비회를 해산하고 당준비회의 지위와 사명을 조선공산단체 중앙위원회에 넘긴다는 의미이다. 또한 러시아령 연해주와 중국령 상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각각 해당 국가 공산당에 가입하되, 조선운동에 대해서는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 반면 간도 지역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는 조선공산당의 유기적인 일부로 간주되었고 조선공산당은 이 조항에 의거하여 만주총국을 설립한다.

 

그밖에 9월결정서는 민족통일전선에서 종교단체에 포함되어 있는 대중을 반일투쟁으로 이끌기 위해 주의 깊은 태도를 취할 것을 조언한다. , 조선공산당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비판이고 그 결과 그동안의 반종교운동은 사실상 철회한다. 또 광범한 군중을 민족해방투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노동자, 농민, 수공업자, 인텔리겐챠, 쁘띠/중급 부르주아와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족통일전선의 조직적 형태는 정당을 제시하였다. 명칭을 민족혁명당이라고 불렀다. 이는 당시 국민 혁명을 선도하는 중국국민당을 모델로 간주했다.

 

9월결정서가 채택된 뒤 코민테른 동방부는 여러 후속 조치를 시행했다. 우선 9월결정서의 내용과 의미를 해설하는 편지를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당에 참여하지 않은 그룹들에게 띄웠다. 내용은 4월대회에서 성립된 공산당에 강력한 신임을 표시하였다. 당외 공산주의 그룹에게는 그 공산당에 속히 합류하라고 촉구, 그것도 단체 대 단체의 통합이 아니라 개인 자격의 입당 방식을 촉구하였다. 두 번째는 러시아 영내에 존재하는 조선공산당과 경쟁할 만한 소지가 있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도록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 검열 및 행정구역별로 재조직하게 하였다.

 

당준비회의, 국민의회 그룹/스파르타쿠스당, 까엔당(북풍파)10, 고려공산동맹(서울파)의 반발과 분노

당분비회의, 국민의회 그룹/스파르타쿠스당, 북풍파, 서울파는 9월결정서에대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이들은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분쟁 격화에 가장 책임이 많은 보이틴스키 해직, 19254월에 결성된 공산당을 특정 정파들의 연합회의로 간주하여 코민테른 가맹단체로 승인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운동 일선의 현장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각 그룹에서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독자적으로 파견하되 모스크바에서는 연합 외교에 임하기로 하였다.

 

조동호와 연합반대파의 대표자들11

조동호는 9월결정서 후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251230일이 돼서야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 조동호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9261월 중순쯤, 연합반대파 대표자들 역시 그때쯤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독자 보고서와 연합 보고서 작성하여 코민테른에 제출하였다. 3번에 걸쳐서 작성된 합동 보고서에는 여러 가지 제안이 담겨있지만 그 중 핵심은 통일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화요회를 포함한 네 그룹 대표자들로 조선공산당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와 동시에 각 공산 그룹의 중앙기관을 해체하자는 안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격분했던 당준비회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이 발발한 192512월 이후에는 전면적으로 조선공산당에 참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 승인안 - 19263월결정서

쿠시넨위원회12를 거친 안은 결국 331일 확대총회에서 가결된다. 3월결정서는 19254월에 결성된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부인 조선공산당으로 승인, 당외 공산 그룹(공산주의 동조그룹)이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조선공산당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들과도 직접 연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은 당외 공산 그룹 구성원들에게 입당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과 당외 공산 그룹들에게 각각 민족통일전선 창설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외에도 상대방의 대중획득 사업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쌍방의 공동 행동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3월결정서 후속 조치

조동호는 동방부에서 극동비서부로 개편된 모임에서 1. 일제의 검거로 인한 새 중앙위원회를 승인해 달라고 요구 승인, 2.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지부 가입을 정식으로 승인했음을 널리 공표해 달라고 요구 관철 3. 연해주 반당파(국민의회 그룹, 구당준비회) 억제 요청 수용 또한 조선공산당 간도총국을 만주총국으로 변경

 

2차당대회와 당 통합문제(2차 조공 1925. 12. 1926. 11.)

2차 조공 시기에는 3월결정서의 영향 등으로 화요파의 조공과 서울파의 고려공산동맹 사이에 통일적 당조직을 건설하기 위해서 세 차례 회합이 있었지만 결렬되었다. 6·10만세사건으로 2차 조공이 다시 일제의 검거로 와해도지만 검거를 피한 김철수 등은 임시집행부서를 구성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19261262차당대회를 소집할 것을 결정하였다. 2차당대회에서는 당조직 정비와 서울파와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3차 조공이다. 3차 조공은 통일전선기관인 신간회, 근우회를 만들었다.

 

3차당대회와 정치노선

192822728일 마지막 당대회에서는 규약을 개정하고 코민테른 결정서를 토의했다. 코민테른 결정서는 19281월 상해국제위원회로부터 이정윤이 받은 것으로 파벌청산, 당을 노동자출신으로 강화할 것, 공장/광산/철동 등에 당세포를 조직할 것, 산별노조의 조직, 신간회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소로서 형성할 것 등을 제시했다.

 

조공은 조선에서 파쟁은 1927년 상반기 이후는 완전히 소멸했다며 파벌청산 문제에 대해서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거부한다. 하지만 결정서에 따라 노동자출신 차금봉을 책임비서, 안광천을 정치부장, 김한경을 조직부장으로 하는 4차당을 조직하였다.

 

19283월 조공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조선민족해방운동에 관한 테제’(정치논강)를 채택한다. 당시 조선의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는 테제는 장래 조선의 권력형태는 조선 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주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고 하면서 조선실정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인민공화국의 구체적 형태는 무엇인가? 민족주의 진영을 포함하는 계급연합 정부로서 지방자치를 하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정부로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모여 만든 공동전선 정부이다. <최규진 식민지시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소비에트론’>

 

분파청산과 볼세비키당

코민테른은 조선 사회주의운동가들을 국내에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해서 조선에 볼세비키당이 건설되는 것을 지원하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파는 극복하지 못했다. 또한 당재건운동가들은 신간회 같은 통일전선 조직을 당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한다. 자본가나 소부르주아와 함께하는 당을 거부하고 노동자, 농민이 중심인 당을 건설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일제의 폭압밑에서 공산당이 합법정당이 될 수 없고 굳건한 지하조직을 갖고 있고 공장, 광산, 농촌의 대중과 함께 직접 연결되어 있는 당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1930년대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생성 숭배와 트로츠키주의를 거부했다.

 

, 당재건운동가들은 볼세비키당을 강조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의 방침과 밀접하다. 5차 코민테른대회에서 당의 볼세비키화를 내걸었다13. 코민테른이 말한 당의 볼세비키화는 러시아가 코민테른과 그 회원 공산당을 지배하는 경향으로 당의 스탈린주의화를 촉진시킴으로써 당내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소련 정책에는 오류가 없다는 신화를 퍼트려서 각국 당들의 활동을 더욱 소련 대외 정책에 기대게 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생성과 트로츠키주의를 반대하고 레닌주의로 통합하려고 했다. 이는 레닌의 외투를 걸치기 시작한 스탈린이 레닌주의 우상화와 맞물려 있었다. 각국 공산당이 러시아공산당 다수파에 완전히 충성, /내부의 적에 맞서 소련의 이익을 보호, 어떤 분파, 경향, 그룹을 허용하지 않는 중앙집중화된 당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볼세비키당 건설론은 분파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었고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하나같이 기계적으로 코민테른의 방침을 따른 결과를 낳았고 이는 당재건운동의 걸림돌이 되었다. 레닌은 분파를 당의 문제들에 대한 견해들이 특수한 정강에 의해 통합된 당내부의 조직이며 내부규율로 결속되어 있는(당내 기관의 소속 대표자를 자기 그룹에서 다수결로 선임하는 당) 조직이라고 규정했다. 이탈리아 좌익분파 이론지 빌랑(Billan)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작업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반면 스탈린은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하여분파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의지의 통일체로서의 당을 말하면서 분파금지를 보편화시켰다. , 식민지시대 조선사회주의자들의 분파는 앞에서도 다루었듯이 보이틴스키그룹의 배타성, 당의 볼세비키화와 관련속에서 평가해야 한다.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코민테른의 12월테제

4차 조공은 19287월부터 10월에 이르기 까지 계속적인 일제의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었다. 코민테른은 19286차 대회 직후 조선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대한 테제’(12월 테제)를 발표했다. 12월테제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와 빈농에 기초한 당 재건운동으로 나아갔다. 12월테제는 명시적으로 조공의 해체를 지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제시한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당재건의 과제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과도한 요구였다. 따라서 많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실질적인 조공의 해체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14 이후 코민테른은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19303월에 조공의 만주총국이 193110월에 일본총국이 각각 해체되었다.


  1. 중국 공산당 총서기(및 실권자) : 천두슈( ∼1927년) - 취추바이( ∼1928년) - 리리싼(1928∼1930년) - 왕밍(1931∼1935년) - 마오쩌둥 리리싼: 1930년 7월 후난 성의 성도인 창사를 점령했으나 3일만에 재탈환 당해 창사 소비에트 구성에 실패. 이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탄핵당해 중앙 지도붕에서 제명되고 모스크바로 소환. 1967년 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견디지 못해 자살 왕밍: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그해 모스크바 중산대학교에 입학. 파벨 미프의 지원을 받아 대학에서 공산당 교조주의 종파를 형성한 뒤 중국으로 귀국 리리싼 노선에 반대해 당 중앙위원회 주도권 장악. [본문으로]
  2. 1925년 5월 30일 운동은 중국 공화국 초기에 벌어졌던 노동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 중국 전역으로 퍼진 이 운동은 상하이 경찰이 외국인 거주지에서 파업을 벌인 중국인을 저격하면서 시작. [본문으로]
  3. 1935년 7차 코민테른 대회의 인민전선에 의해 1937년 9월 2차 2차 국공합작(1937년∼1945년) 이 조약이 타결되자 소련은 사실상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정책을 약속. 1945년까지 국민당 정부는 소련의 군사 원조의 주요한 수혜자였다. [본문으로]
  4.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현 위원회 산하의 민족별 지부의 위상을 가졌다. 그들 대부분은 조선인 적군 빨치산부대에서 활동하면서 당활동을 하였다. [본문으로]
  5.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부대로서,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의 오하묵·최고려 등과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부대이며,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파계였다. 그러나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박애·장도정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이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와 반목하는 이들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혁명군정의회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박이리아는 이에 불복했으나, 홍범도·안무(安武)의 부대가 마사노프에서 자유시로 빠져나오자 점차 고립되었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29연대를 동원, 6월 28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대도 29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본문으로]
  6. 조훈은 국제공청 동방부 위원으로 국제공청과의 교섭을 주선, 남만춘은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 혁명운동 및 재러시아 조선인들의 공산주의운동에도 적극 가담. 코민테른과의 외교에 도움을 줌 [본문으로]
  7. 보이틴스키 그룹은 지노비예프 그룹의 일환으로 보이틴스키 그룹의 성쇠는 러시아공산당 내 지노비예프 그룹의 진퇴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리 보이틴스키(1893∼1956, 1925년 당시 코민테른 동방부(아시아, 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영역에 걸쳐서 식민지 약소민족의 혁명운동을 지원) 6인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재상해 원동부 부장으로 재임하는 등 조선과 중국 문제에 관여)는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1921년 2월 동아시아 공산주의운동을 조정하기 위해 국제당 극동비서부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도 5인 간부 중 한 사람이었다. 보이틴스키는 조선에서도 공산당 창당을 서둘렀다. 그래서 1921년 5월에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창당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영향력 있는 토착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망라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구미에 맞는 해외 이주민 위주의 공산주의 그룹을 편파적으로 지원. 결과적으로 초창기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분열로 이끌었다. [본문으로]
  8. 남만춘, 조훈 등 원조 이르쿠츠크파/ 여운형, 조동호 등 재상해 이르쿠츠크파/ 김재봉을 위시한 조선 내지 이르쿠츠크파 [본문으로]
  9. 조봉암은 소비에트공화국을 민중적공화국이라고 칭하였다. [본문으로]
  10. 까엔당은 조선인민당을 뜻하는 러시아어 ‘카레이스카야 나로드나야 파르치야’의 이니셜로 추정되지만 속뜻을 풀어 놓은 당사자들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의미는 아직 알 수 없다. [본문으로]
  11. 고려공산동맹 대표자: 김영만, 최창익, 이운혁/ 까엔당(북풍회) 대표자: 신철, 김영우/ 스파르타쿠스당 대표자: 이남두 [본문으로]
  12. 쿠시넨, 콘블럼, 바실리예프, 페퍼, 가타야마, 포킨, 슈티르너, 페트롭스키 등 [본문으로]
  13. 독일의 10월 혁명이 실패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당내 투쟁이 강화되며 자본주의가 안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코민테른은 위기에 빠졌다. 유럽혁명은 실패했고 소련은 홀로 서 있고 분파적 논쟁은 코민테른과 공산당을 위협했다. 그리고 1924년 레닌의 죽음, 스탈린주의의 중앙집중화 관료화가 나타났다. 즉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안정되는 국면에서 러시아 공산당의 복잡한 국면을 코민테른에 그대로 반영시키면서 볼세비키화의 표어가 나타났다. [본문으로]
  14. 연구자에 따라 해체를 명시했다는 의견부터 여러 가지 이견이 존재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