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동권 실현 무엇을 할 것인가?

연이야 2016. 5. 13. 15:29

1. 들어가며

인권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노예(노비)는 말하는 도구였으며 봉건체제하에서 농노, 농민은 노예보다 일정 정도 권리를 가졌지만 국가, 귀족들로부터 인신적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중세 말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그들의 경제활동의 자유(핵심은 이윤추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봉건귀족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인권 개념이 등장하였다. 결국 자본주의 성립의 과정은 인권적으로는 자유권의 확립과정이고 계급적으로는 봉건귀족을 누르고 부르주아가 주도권을 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시민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는 무산자들의 도움 없이는 결코 시민혁명을 성공할 수 없었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성장은 부르주아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자유권을 문제 삼으면서 사회권, 특히 노동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노동권이 등장하는 사회적 배경 그리고 간단히 노동권을 실현하려는 역사적 움직임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자유권 : 실질적 불평등을 형식적 평등으로 왜곡

① 이중의 의미의 자유 -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 인신구속으로부터 자유

자본의 시초 축적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자본 축적이라고 하는데 최초로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다. 즉 소수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배타적, 독점적으로 소유되고 다수는 폭력적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임노동화하는 과정, 즉 자본과 임노동 관계를 창출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시초축적이라고 한다.

○ 농민으로부터 토지 수탈(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

자본의 시초축적에서도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 전체 과정의 토대를 이룬다. 양모의 가격이 등귀하면서 봉건귀족들은 경작지를 목양지 전환시킴으로써 농민들을 추방(엔클로저 운동), 종교개혁에서 왕이 교회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여 귀족, 차지농업가, 부르주아에게 팔았고 이들은 종전의 세습적 소작인 축출, 국유지/ 공유지 횡령, (스코틀랜드)씨족의 대표자가 씨족의 토지를 횡령하여 사냥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농민 청소(사유지 청소)를 하였다.(한국에서는 저곡가 정책, 새마을운동 등)

○ 인신(인격)의 구속으로부터 자유

부르주아들은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봉건귀족으로부터 구속당한 경제활동의 자유를 원했다. 경제활동의 자유란 토지의 자유(소유, 처분, 저당의 자유), 활동(이동)의 자유, 자신들의 법정(재판), 도시 치안, 세금 완화 내지는 스스로 과세를 원하였다. 또한 귀족들에게 인격적으로 구속당한 평민이 아닌 이동의 자유와 계약의 주체로서 무산자들이 필요하였다.

○ 시초 축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본주의 특성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축적방식,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타인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사적 소유)는 개인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사적 소유를 철폐해야만 가능하다. 즉, 자본주의는 임노동자로부터 자기의 노동을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빼앗아야만 가능(자본축적의 적대적 성격)하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임노동자를 끊임없이 재생산할 뿐 아니라 자본축적에 비례해 임노동자의 상대적 과잉 인구를 항상 생산한다.


②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자연법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연법 철학이란 신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었고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활동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생산활동을 통해 생산한 물건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사유재산제는 신이 부여한 자연권이다. 그리고 사유재산제가 자연적인 인간의 권리라면 재산을 소유한 자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사용권을 갖는 것도 당연하므로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 철학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생활에 간섭하는 것은 자연적 질서에 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연법 철학은 자유방임주의의 토대이며 이후 애덤스미스를 거쳐 주류경제학의 시장만능주의로 이어진다.

결국 자유주의는 중세의 기득권(봉건 귀족, 교회)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로서 토지의 자유(소유, 처분, 저당의 자유), 활동(이동)의 자유, 자신들의 법정(재판), 세금 완화 등등으로 나타났다. 즉 자유주의는 부르주아 소유권 절대화와 이윤 추구의 자유가 핵심이다. 이처럼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권은 봉건귀족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요구였다. 하지만 무산자들이 투쟁에 결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였다.


③ 경제적 불평등을 정치적 (형식적)평등으로 왜곡하는 사회

이처럼 자본주의는 인격적 자유와 토지 등 생산수단으로부터 추방(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으로 탄생하였다. 그 결과 형식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제적 불평등,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입헌적 의회 정치(간접제-민중 배제)를 표방한다. 하지만 ①시민혁명 초기에는 재산권 정도에 따라 투표권 부여 ②무산자계급의 투표권 쟁취 투쟁 등 민중의 요구를 형식적으로 수용, 자유주의적민주주의 완성 ③현재의 대의(간접)민주주의는 간접제일 뿐이며 부르주아에게만 민주주의를 허용하는 부르주아독재에 불과하다.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시장의 합리성을 주장하면서 국가개입을 반대하는 부르주아들도 경제위기시기에는 독점자본에게 구제금융을 지원하라고 국가에 압력을 행사한다. 즉, 이윤 추구에 방해가 되는 각종 규제는 반대하지만 독점자본에 대한 지원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즉, 자본의 이윤 추구 자유와 부르주아의 소유권 절대화가 핵심이다. 또한 사상, 언론, 종교의 자유를 법에 명시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힘이 강화되면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를 보장하는 한에서만 자유 행사를 인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다.


④ 배신 당한 ‘자유․평등’의 꿈

봉건체제의 구조적 위기 속에서 시민혁명이 이루어낸 ‘자유’ ‘평등’의 이념은 분명 인간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물을 차지한 부르주아계급의 주된 관심사가 자본주의 확립과 발전에 필요한 소유권과 경제활동의 보장에 있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산업자본의 지배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평등’의 내용이 형식화(‘법 앞의 평등’) 됨과 동시에 ‘자유’의 내용은 변질된다. 즉 사상․표현․신체 등 정치적 ‘자유’는 하위규범에 의하여 엄하게 제약되고 경제활동 및 재산의 ‘자유’는 한결같이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적 ‘합리성’)

근대시민혁명은 자본주의의 전개를 확보하는 사회혁명이었으며, 근대 시민헌법은 그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것은 분명 인간해방의 새로운 단계였지만 “착취사회 내부에서의 진보일 뿐”(Karl Marx)이었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부한 속성을 가진 ‘인간’이 해방된 것이 아니라 ‘노동력(상품) 소유자로서의 인간’만이 해방된 것이다.


3. 자본주의 사회 : 노동소외는 인간소외

① 인간화에서 핵심은 노동

○ 손과 발의 역할 분화

인간이 직립을 하게 된 것은 손과 발의 역할이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손/ 발의 분화, 자유로운 손의 획득은 노동의 결과물이고 자유로운 손을 획득함으로써 손을 통한 자유로운 노동이 가능했다. 자유로운 노동은 인간의 근육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이런 과정에서 인체의 다른 기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간의 손의 점차적인 정교화와 이와 보조를 맞추어 진행된 보행을 위한 발의 발달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상관관계를 통해 유기체의 다른 부분에 반작용하였다.”

손의 발달과 더불어 노동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더욱 확장하였고 인간 상호 원조와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작업이 증가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각 인간들의 긴밀히 결합시키는 데 필연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리고 사회성(군집성)이 증가할수록 정교한 의사소통의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분절된 언어의 필요성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즉, 노동을 통한 손과 발의 분화, 자유로운 손의 획득은 인간의 기관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인간으로 진화시켰다.

○ 인간의 노동과 동물의 노동

엥겔스는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는 노동이라고 보면서 노동도구의 제작과 함께 시작된다고 한다. 동물들은 채집 또는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동물들이 먹어치운 식물이 사라지면 이동하며,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다. 하지만 영역 확장이 한계에 도달하면 개체 수는 감소하고 그 결과 식물은 다시 증가하여 균형을 이루게 된다. 결국 동물들의 생태순환은 장기적으로 보면 자연의 굴레 내에서 해결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약탈농업으로 인해 식용 식물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야만 했으며 그 식용 식물들 가운데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점점 더 많아 져야만 했다. … 인간화의 화학적 조건들도 더 다양해져야만 했다.” 즉,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연에서 식량을 구하지만 동물은 서식지를 황폐화 시키지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이 섭취할 수 있는 식물들의 수를 늘려갔으며, 먹을 수 있는 대상의 수 또한 증가시켜갔다. 그리고 그 노동은 도구의 사용을 통해 시작된다.

○ 인간과 동물의 분리

인간이 동물로부터 분리될수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행위는 합목적성을 갖게 된다. 동물은 자신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모른고 외부 자연을 단순히 이용할 뿐이며 따라서 동물이 야기한 자연의 변화는 동물의 존재를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부합될 수 있도록 변형시키면서 자연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 지배는 결코 자연에 배반된 지배는 아니며 인간은 자연에 속한 존재로서 다른 종에 비해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우수하다는 점이다.


② 노동 소외

○ 마르크스의 노동 소외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과 자본이 분리되어 있다. 생산수단이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판매하여 임금을 얻는 노동자와 생산수단(토지나 공장, 기계, 원료 등)을 소유자한 자본은 잉여가치를 얻는다. 노동자의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의 것으로 된다. 게다가 자본가는 자신의 가치 이상을 창조하는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을 일정시간 동안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본질은 자본(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타인의 노동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임금을 될 수 있는 한 낮은 수준으로 억누르면서 노동시간을 가능한 길게 연장하고, 노동의 강도를 가능한 높게 해서, 생산을 확대하고 이윤을 높이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 결국 부의 증대는 결코 노동자의 풍요로움의 증대가 아니라, 자본의 증대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의 증대란 노동자가 생산물을 점점 많이 만들어내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그들의 손에서 분리되어 자본가의 수중에 집중된다고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노동자는 그가 부를 보다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그의 생산력의 범위가 보다 증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점점 빈곤해진다. 노동자는 상품을 보다 많이 만들어 내는 만큼, 그는 보다 값싼 상품으로 전락한다.

○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 자신의 노동이 만들어 낸 생산물이 자신의 것으로는 되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에 있어서 낯선 존재로 되고, 생산자와 무관한 권력으로서 노동자에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의 결과물을 자신의 것으로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자신으로부터 소원한 것으로 되는 소외로서 또는 타인에 대한 양도인 외화(外化)로서 나타난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은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그것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집을 생산한다. 그것은 미(美)를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불구를 생산한다. 그것은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인 노동으로 되던지며, 또 다른 일부를 기계로 만든다. 그것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정신박약과 백치병을 생산한다.’

○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

소외된 노동은 노동자에 있어서 고통이고 불행이며,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이며, 퇴폐화이다. 노동자는 노동 밖에서 쉬고,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노동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노동이다. 노동은 노동이외의 곳에서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강제력이 없는 곳에서는 노동은 페스트와 같이 기피되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에 종속된 것이며, 노동자의 활동은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상실이다.

○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대표적 사례: 인종차별, 이주노동자 차별 등)

소외된 노동에 있어서 노동자는 다른 인간과 대립하게 된다. 다른 인간은 한편에서는 자본가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노동자이다. 노동자가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고 하는 것은 그의 생산물의 소유자인 자본가와 대립하게 된다. 노동자가 노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된다고 하는 것은 그 노동자체를 지배하고, 노동을 강제하는 자본가와 대립하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소외되고 외화된 노동을 통해, 노동에서 소원하게 되고 또 노동의 외부에 서 있는 인간의 이러한 노동에 대한 관계를 산출하게 된다. 노동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는 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혹은 그 다른 사람이 노동의 주인을 무엇으로 명명하든, 특히 그 주인과의 관계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의 주인을 주인답게 하는 사유재산제는 소외된 노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본의 축적과 집중은 점점 많은 농민, 중소자본가, 자영업자를 노동자로 몰락시키게 된다. 노동자 인구의 증대는, 나날이 노동을 상품으로 판매하도록 하는 노동자 상호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이것에 의해, 노동의 가치를 훨씬 저하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노동자와 자본가의 분열, 자본가 상호의 경쟁 및 생존을 둘러싼 노동자들 상호간의 경쟁은 인간의 사회적 공동성을 상실시키고, 인간의 인간다움의 상실에 훨씬 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소외된 사회, 세계를 만든다. 즉, 통제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계급과 국가, 인종차별, 여성차별, 종교 갈등, 극심한 빈부 격차로 개인들이 서로 소외되고 성, 예술, 교육 등등의 것이 상품이 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품을 살 수 없는 세계이다.


③ 노동소외는 인간소외

○ 인간의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마르크스는 인간은 하나의「유(類)적 존재」라고 한다. 인간이 하나의 유적 존재라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 본연의 능력(인간다움)이고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인간다움에서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인간다움은 첫째로 인간이 자연적 세계를 과학의 대상으로도, 예술의 대상으로서, 보편적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인간은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자신의 육체적 신체가 아닌 신체)로서 자연 전체와 보편적으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방식은 자연을 직접적인 식량으로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활동(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발현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있어서 자연을 보편적인 소재로 하고, 대상으로 하고, 도구로 하려는 관계방식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존재이고, 노동을 통해서만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노동은 자아실현의 수단인데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생계 유지를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한다. 그 결과 이전처럼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유적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연명하는 생명활동으로 바꾸었다. 그럼으로써 노동은 그 자체로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함으로써 발생하는 생산물, 임금을 위한 활동이 되었다.

이리하여 노동에서 형성되고 확인된 인간의 인간다움이 전부 상실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그 자신의 신체를, 마찬가지로 그의 밖에 있는 자연을, 또 그의 정신적 본질을, 요컨대, 그의 인간적 본질을 소외시킨다. 신체의 소외는 만성 비만, 식욕 부진, 성의 상품화이며 자연의 소외는 기후변화, 환경 파괴이다.


4. 노동인권 실현은 인간해방의 길

노동인권의 실현의 역사는 노동인권을 쟁취하려는 노동운동사와 맥을 같이 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운동의 현실(노동운동의 수준- 조직, 의식, 투쟁, 노동조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과거 투쟁과 활동의 결과이며 변화 과정 중의 일부이므로 현실을 역사적으로 점검, 반성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한계로 여기서는 국제 노동자 조직인 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주요 쟁점을 살펴본 뒤 현재에 대한 전망을 하는 것으로 갈음을 한다.


① 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연맹, 1864~73)

○ 착취의 과학적 해명 : 잉여가치론

맑스는 고전파와 다른 사회주의 사상가와 결정적 차이가 유물론적 역사이해, 잉여가치론이라고 강조한다. 맑스는 노동력과 노동이라는 개념의 구분을 통해 이윤의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노동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잉여가치이다. 잉여가치는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이며 그래서 자본주의 착취는 구조적/필연적이다. 즉 자본주의 문제는 분배가 아니라 생산에서 발생된다.

이처럼 잉여가치론은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의 모순을 밝혔다. 잉여가치론의 발견은 맑스 개인의 천재성을 넘어 서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착취를 당하고 여기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이 있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맑스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기 때문에 고전파들이 결코 볼 수 없었던 잉여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런 열망이 제1인터내셔널로 나타난다.

○제1인터내셔널 ; 맑스주의 대 아나키즘

제1인터내셔널은 영국, 프랑스 노동자들의 오랜 준비로 결성된다. 노동 계급의 해방은 노동 계급 스스로의 과제(공산당 선언에는 없는 내용)라고 밝히고 노동 계급의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제1인터내셔널에서는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이 대립하였다. 맑스주의에서는 국가 권력을 장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과도기를 설정하였다. 반면 아나키즘은 국가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역시 비판을 한다. 아나키즘은 쁘띠적 속성의 일부를 표현한 것으로 결국 노동운동내에서 차츰 영향력이 줄어든다.

○ 파리코뮨과 새로운 국가론

1871년 파리코뮨이 발발하자 맑스는 ‘프랑스 내전’을 발표한다.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기성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즉 기존의 국가권력을 단순히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국가기구를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설정하였다. 그 외에 맑스가 주목했던 파리코뮨의 특징은 상비군을 무장인민으로 대체하자는 주장, 행정부와 입법부 통합, 소환권을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강화, 인민들의 발의권, 교회 재산 몰수, 선거를 통한 사법 공무원 선출, 노동자 보호입법, 노동자의 직접 경영, 모든 행정의 공개와 민주적 절차, 여성들의 적극 참여 등이다. 아무튼 파리코뮨은 새로운 정치형태로 이런 특징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의미한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에 대한 단순한 지배가 아니라 기존 국가권력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형태가 모색되는 사회주의로 가는 정치적 이행기를 의미한다.


② 2인터내셔널(사회주의 인터내셔널, 1889~1914)

제2인터내셔널에서는 수정주의 논쟁, 총파업 논쟁, 반전 논쟁, 식민지 논쟁을 통해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로 갈라진 시기이다. 제1인터내셔널시기와 비교했을 때 변화는 맑스주의에 입각한 노동운동이 큰 규모로 존재했고 아나키즘이 약화되었고 1900년까지는 중앙의 기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은 조직적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는 수정주의/반전 논쟁만 다루겠다.


○ 수정주의 논쟁

- 수정주의 개념과 등장 배경

개량주의는 전술적 차원에서 일상투쟁, 경제투쟁, 의회전술을 사용하지만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의 기본적 원칙들 중 일부가 더 이상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원론적 입장 자체의 수정을 의미한다. 수정주의의 등장 배경은 1870년대 특히 독일에서 맑스주의 등의 여러 사회주의적 이념들이 노동운동과 결합된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사민당은 일상생활속의 다양한 활동(임금 인상 투쟁, 노동조건 향상 투쟁 등등)을 전개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의회주의적 전술, 일상에서의 개량주의적 실천이 유효하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된다.

-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노동자계급의 임금 향상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졌고 중소 상인, 중소 자본가, 자영농도 증가했고 자본가도 증가했으며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위기를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붕괴를 전제로 한 혁명적 이행전술은 폐기되어야 하고 현실적인 수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 개량이냐 혁명이냐 : 베른슈타인과 룩셈부르크의 논쟁

베른슈타인에 대한 대응은 룩셈부르크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을 경제학적으로 해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량과 혁명 사이에 선택을 요구한 문제틀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베른슈타인은 혁명을 멋대로 불법 무장봉기로 정의하고 혁명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의회를 통해서만 사회주의는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전제는 역사 발전은 과거의 지속적인 누적이고 이 누적을 위해서는 단절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혁명이란 기존 체제의 전복이자 단절이며 입헌적 질서 내에서의 개량으로는 현존 사회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개량은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입헌적 질서의 틀 내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혁명과 개량은 다른 범주에 속하며 비교해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런 역사관을 경제에 적용했을 때 베른슈타인의 개량의 누적이란 무엇일까? 실질임금의 상승, 생활수준의 향상, 노동조건의 개선이 증대되는 것을 사회주의 실현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잉여가치 때문에 생산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착취를 발생시키며 그것에 의존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생산양식 자체를 다른 생산양식으로 바꾸지 않는 한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즉 생산양식에서 단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룩셈부르크의 생각이다.

이렇듯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에서 이탈했다.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계급을 나누는데 베른슈타인은 소득수준 차이로 바꾼다. 또 맑스주의에서 그당시 자본주의 붕괴설은 불비례설과 과소소비설이다. 당시 독일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상승했으니까 과소소비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시장 불균형은 카르텔의 등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안정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개량에 치중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주장의 근거는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 수단이 아니라 중립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노선은 정치권력의 혁명적 장악, 국가의 궁극적인 해체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부르주아 독재의 반대개념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독재 일반과 동일하게 사용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제한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그 자체로 인식하는데 베른슈타인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 반전 논쟁

19세기말 20세기초의 상황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다른 제국주주의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변절된다. 아무튼 반전 논쟁은 독일 사민당처럼 전통적인 방어 전쟁의 논리를 주장하면서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측과 총파업 등의 수단을 사용해서 공세적으로 전쟁 시도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측으로 나뉜다.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계급적 입장에서 민족 전쟁의 문제에 대해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당들은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 열기에 휩쓸리며 자신들의 기회주의 본색(전쟁 찬성)을 드러냈고, 결국 부끄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노동자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의 당들과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혁명그룹인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 제3인터내셔널 탄생 배경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침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침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침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레닌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하지만 “침머발트 좌파”는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전쟁을 내전으로)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침머발트 좌파”의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그들의 원칙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인 침머발트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침머발트 좌파의 교훈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근본 원칙이 위선적인 선언들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든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들과 봉기들을 주도한 것도 모두 침머발트 좌파와 같은 흐름이었다. 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핵심을 제공한 것도 이들 동일한 흐름들이었다.

아무튼 1차 대전을 계기로 전쟁 찬성측은 서유럽 중심의 사민주의로, 제국주의 전쟁 반대 측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완전히 나뉘어 진다. 즉 서유럽 사민주의 기원은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했거나 적어도 승인, 방관했던 세력이다.


③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 1919∼1943)

○ 레닌 시기의 코민테른 (1919∼1923년)

창립대회에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선언’에는 당의 역할보다는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강조, 또한 부르주아민주주의 해산과 프롤레타리아독재 강조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노동자병사평의회/직장위원회/총파업/시위는 프롤레타리아의 급진화를 드러냈지만 혁명적 내전으로 전환될 조짐은 없었다.

- 볼세비즘의 보편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볼세비키 모델의 보편화가 그저 위에서 강요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점, 교의의 순수성과 조직적 연대에 대한 강조가 국가 탄압에 맞닥트린 많은 공산당을 존속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볼세비키들은 서유럽 혁명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직적 취약성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세계혁명이 성공하려면 코민테른과 각국 지부는 1917년 볼세비키의 성공을 보장했던 단일한 조직 원칙에 바탕을 삼은 실질적인 세계당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좌익공산주의: 하나의 유치한 혼란’을 통해 절대적인 중앙집중화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엄격한 규율이 부르주아에 대한 승리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 7∼8월의 2차 대회는 실질적인 코민테른의 창립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코민테른 가입 21개 조건을 공식화하였다. 21개 조건은 유럽사회주의 정당의 일반당원들, 혁명을 배반했던 우파와 중도주의 지도자들의 영향권밖으로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즉, 개량주의/중도주의 제거와 노동조합에 세포 조직, 철의 규율에 바탕을 둔 민주집중제, 소부르주아의 주기적 숙청이었다.

2차 대회는 공산당 창립을 의제로 제기했다. 이에 따라 독일 독립사민당과 독일공산당 통합,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당원들은 주로 20/30대 남성산업노동자이며 그들은 새로운 산업의 비숙련/반숙련 노동자가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전쟁의 충격과 빈곤, 실업에 대한 불만으로 급진화 되었다.

- 코민테른 볼세비키화 이유

1921년 3차 대회는 집행위원회(ECCI)를 세계운동의 실질적인 중심 지도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집행위원을 각국 공산당에 파견하였다. 그 이유는 ①1921년 유럽에서 혁명의 전망이 더 멀어지고 있었고 코민테른과 지부의 공고화는 볼세비키당 통일이 안팎의 위협의 시기에 보장되어야 했다. 그래서 1921년부터 세계당은 세계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조직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도구라기보다는 혁명을 기다리면서 공산주의 운동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 관리하며 훈련시키는 수단이라는 시각도 있다. 고립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생존과 결부된 국가 밖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코민테른에서 볼세비키의 처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②유일하게 혁명에 성공했다는 초기 볼세비키 특권으로 코민테른에서 커다란 정치적, 이론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었다. ③제2인터내셔널의 느슨한 연방 구조가 무능과 실패의 주된 이유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 노동자 공동전선

1921년 레닌은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더는 의제가 아니고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서 일시적인 휴식이 필요했고 이런 배경에서 노동자 공동전선이 제시되었다. 자본주의 공세에 맞서 사민당의 평당원과 함께 벌이는 공동의 방어 투쟁으로 공산주의를 대중화하고 개량주의 지도자의 위선을 폭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일정한 조건에서 개량주의 지도자들과 일시적인 동맹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정책은 여러 공산당에서 거센 반대에 부딪쳤지만 코민테른은 1921년 12월에서 1928년까지 공식적으로 공동전선을 실천했다.

공동전선 전술의 중요한 함의 : 신경제정책을 통한 소비에트 재건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상업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1921년 초 내전에서 승리한 볼세비키는 국가 재건설과 오랫동안 고통을 참아온 농민/노동자를 유화시켜야 했고 따라서 자본주의와 경제 교역은 꼭 해야 할 일)하였다. 즉, 1921년 이전에는 혁명적 공세 이론은 소비에트 국가 이익과 맞닿아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차이가 드러난다. 그리고 차츰 소비에트국가와 교역을 하는 부르주아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조직인 코민테른의 혁명적 사명보다는 외무인민위원회의 외교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과정의 분수령은 1921년 3월이다. 독일 3월 행동이 처참하게 실패, 소비에트 러시아에 네프 도입, 영국과 소련의 무역협정이다. 대표적 사례가 1922년 4월 바이마르 독일과 러시아사이에 체결된 라팔로 조약이다. 라팔로조약의 비밀 규정 아래 베르사유평화조약에 따라 심각하게 축소된 독일군대는 군사적, 경제적 양보를 한 대가로 러시아 땅에서 군대를 다시 추스르고 현대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독일공산당은 공산주의자에게 발포하는 소비에트가 지원하는 독일육군이라는 유령과 맞닥트리게 되었다. 실제로 코민테른의 영감을 받은 1923년 10월 혁명에서 독일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발포를 했다.

많은 공산당들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공산당 등은 공동전선에 반대하였다. 각각의 환경에 새로운 전술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공산당은 프랑스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전선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노동조합영역에서만 공동전술을 수용했다.

사민주의자들과의 행동 통일은 훨씬 복잡하였다. 우익주의의 개량주의 조직과 위로부터의 조직적 통일 경향과 일반 당원들을 그들의 지도자에 맞서도록 아래로부터 교묘하고 철저한 호소사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자에 이르는 정확한 길은 애매모호하였다.

공동전선의 한계와 그에 따른 비관의 분위기속에서 1922년 4차 대회가 열렸다. ‘노동자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에 맞서 격렬히 투쟁한다는 조건으로 그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했지만 노동자 정부 개념은 명확하지가 않았다.

1921년 창립된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은 공동전선의 채택과 함께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혁명적 노조주의자들이 기존의 개량주의 조직에서 조합원 다수를 얻을 수 있게 활동하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적 소수로 독자적인 적색노동조합을 세워야 하는가? 는 명확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조합 사례는 이런 불명확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로핀테른 노선은 혁명의 대의에 조합원 다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개량주의 노동조합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개량주의 지도부는 1922년 친프로핀테른 활동가들을 쫓아냈다. 이에 혁명적 그룹은 적색 노동조합 창립대회를 열었고 1923년에는 16만 명의 조합원을 확보,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공동전선은 표면적으로 조직적 단결과 노동계급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분열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분열은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의 논리적 결과였고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유럽 노동조합주의자 다수를 얻는 데 실패했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주로 사회주의적 노동자 대중과 낮은 수준의 조직을 대상으로 삼았다. 1923년 6월 3차 코민테른 확대 집행위원회 총회에서 ‘슐라게터 연설’의 핵심(민족적 볼세비즘)은 현혹당한 프롤레타리아와 낮은 중간 계급 민족주의자를 파시스트 지도자에게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제적인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코민테른의 작전과 맞닿아 있다고 이해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이 사민주의자들 공격할 때 공산주의자와 나치의 협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레닌때의 코민테른 5가지 모순 ①공산주의적 다원주의와 볼세비키 중앙주의 사이의 긴장 ②레닌은 민족적 특수성과 러시아적 본질을 인정했지만 조직적/이데올로기적 볼세비키 모델을 보편적으로 적용시키려한 그의 주장과 충돌 ③공동전선에 따른 유럽 멘세비키에 대한 반감 ④1921년쯤부터는 세계혁명에 대한 코민테른의 공약은 소비에트 국가 이익과 불편해지기 시작 함


④ 요약

제1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1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에 맞선 전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투쟁에 통합시키기 위한 대리체였다. 1864년에 마르크스를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경향을 띤 노동계급 지도자들이 세웠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스트적 바쿠닌주의 사이의 깊은 분열로 1872년 와해되었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이 깊이 새겨졌다.

2인터내셔널은 1889년에 세워졌고 1인터내셔널처럼 개량주의와 혁명적 분파와의 동맹이었다. 주요 참가 당은 독일사민당, 프랑스사회당 등이다. 규율, 강령, 전술적 명령이 중앙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느슨한 구조였다. 이런 구조는 통일된 행동도 불가능하였고 이데올로기 분열도 막지 못했다. 결국 2인터내셔널은 1914년 8월 민족적 쇼비니즘에 부딪치며 무너졌다.

이에 레닌을 비롯한 혁명적 그룹들은 치머발트 좌파를 형성(1915)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혁명적 패배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면서 의회민주주의를 반대했다. 결국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가대회에서 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세워졌다. 코민테른은 세계당을 세우자는 사명을 띠고 있었지만 완수하지는 못했다.


5. 쇠퇴하는 자본주의, 노동해방의 길은 무엇인가?

① 현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 구조적 위기

최근 30여 년 동안만 보더라도 7년~10년에 한 번 씩 터져 나오는 순환적 공황들이 3-4 차례 있었지만, 자본가계급이 대대적인 경기부양과 거품경제를 일으켜 한 두 해만에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현재의 공황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대의 공황”,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라고 저들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천문학적인 구제 금융과 경기부양책(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으로도 틀어막지 못한 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현 위기는 순환적 위기에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가 중첩된 것이다. ‘역사적’이라 함은 7~10년의 산업적 주기(‘경기변동’ 주기)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통해 역사적으로(자본축적의 경제적 추세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투쟁, 제국주의 국제관계 등의 정치 · 사회적 추세들을 포함한 구체 역사적 조건들을 매개하여) 누적되어 온 구조적 성격의 위기라는 뜻이다.


②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새로운 계급투쟁만이 노동자계급에게 답을 제공한다.

시위에서 광장점거로, 점거에서 대중파업으로 진화하는 유럽과 북미의 대중투쟁과 다르게, 한국의 계급투쟁은 여전히 사민주의와 조합주의 덫에 걸려있다. 또한 부르주아선거 시기마다 야권연대, 진보대통합, 노동자정치 세력화는 결국 스탈린주의의 실패한 인민전선의 되풀이 일뿐이다. 그동안 이들의 대리주의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투쟁분출과 계급투쟁의 혁명적 확산에 장애물이 되어왔다.

이러한 대리주의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 스스로 정치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립적인 조직과 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계급의 정치조직인 혁명당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인민전선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자본주의 쇠퇴시기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스스로의 조직 확장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전 계급적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립적인 총회 조직들과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을 통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끝 모를 자본주의의 위기상황이 더욱 깊어지는 현 정세에서 반자본주의 투쟁전선 구축과 혁명적 계급투쟁의 부활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계급투쟁의 역사적 성과물인 혁명 강령이라는 무기를 들고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단련되고 혁명적인 부위들은 혁명당으로 집결하여, 자본과 국가를 효과적으로 압박하고 계급투쟁의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쫒아 다니는 의회주의 정당들이 아닌 혁명당만이 계급의식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고,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설정하고 혁명적 무장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둘째, 갈수록 관료화, 자본의 기구화 되어가고 있는 조합주의와 노조운동을 넘어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노동자민주주의가 철저하게 실현되는 투쟁조직, 총회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현재 유럽과 북미의 계급투쟁에서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 대중총회는 투쟁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대중총회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의 주도권을 실제로 가져올 수 있고,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진정한 공간이다. 대중총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며, 어떠한 조합주의와 계급협조주의에 의해서도 그 결정을 제한받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의 다양한 부문들을 통일시킨다. 노동자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총회조직들이 바로 노동자계급이 각성하고 단결하여 한 단계 진전된 행동을 준비하고, 집단적 자심감과 자신들의 의지로 투쟁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중투쟁조직과 직접행동에 기반 한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조직된 노동자들의 계급성과 전투성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계급투쟁의 발발과 혁명적 계급의식이 만나 계급투쟁을 이끌 때, 공장의 담벼락과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수평적 노동자조직들의 출현은 계급투쟁이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시기 노동자평의회를 현실화 시켜줄 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계급투쟁들 속에는 이미 “세계 혁명”을 요구하며 국경을 넘는 운동의 “확대”를 주장하는 슬로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집회들에서 노동자국제주의를 위한 “국제”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투쟁의 형식과 내용들은 국제적으로 전파되어가고 있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도 낡은 사민주의와 조합주의의 덫을 걷어내고, 지금 당장의 직접행동과 노동자민주주의에 기반 한 대중투쟁으로, 자본주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길에 거침없이 나서야 할 시기이다.


6. 나가며

역사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노동인권’을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으며, 양자의 긴장관계 변화에 따라 ‘노동인권’의 실질적 내용은 변해왔다. 지배계급은 ‘노동인권’을 가급적 형식적으로 그리고 강제력 없는 ‘강령’으로 취급하려고 해왔다. 한편 피지배계급은 그렇게 형식화되고 유명무실해지려는 ‘노동인권’을 실질적 권리로 세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권리를 계속 받아들임으로써 ‘노동인권’개념의 지평을 넓히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이런 양자의 힘이 충돌하는 오랜 세월 속에서 빚어져 온 결과물이 현재의 노동권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권은 헌법이나 조약이나 선언에 항목을 써넣기만 하면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배신 당하면서도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피를 흘렸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오랜 세월 싸워왔을까? 노동인권의 쟁취는 노동소외를 극복하는 길인 동시에 인간해방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