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리오 휴버먼 저)①

연이야 2011. 8. 14. 17:07

이 책은 1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2부 자본주의에서 어디로? 구성되었다. 1부는 봉건제의 사회의 구조, 정치, 상업 발달의 과정 종교개혁, 중상주의와 그 비판, 중농주의,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이행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1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은 중세 시대의 전형적인 사회 인물상이다. 성직자와 영주, 기사는 기도와 전쟁만을 하였지만 일하는 사람인 농노는 평생 농업 노동을 했지만 부역과 지대, 십일조 등등으로 일생을 가난과 궁핍으로 보냈다. 오히려 성직자와 영주, 기사는 봉건적 특권으로 농노 노동의 결과물을 차지하였다. 장원은 경작지(영주 직영지 ⅓, 그 외 농노 보유 토지) 방목지, 목초지, 삼림, 황무지로 구성되어있다. 농노는 집과 토지를 소유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는 다르지만 토지에 예속된 존재였다. 영주 직영지에서 무보수로 일을 했고 각종 기구 사용료와 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농노도 직영지 농노(매일 직영지에서 노동하는 농노), 변두리 사람(작은 농지 보유), 오두막 사람(농업 날품팔이), 예농(인격, 경제적 자유가 어느정도 허용)로 다양하였다. 봉건시대는 봉토를 매개로 주군과 봉신간에 쌍무계약이 주된 특징이었다. 주군은 봉신에게 토지와 보호를 봉신은 그 댓가로 세금과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교회는 봉건시대 최대의 지주로 서유럽 토지의 ⅓∼½를 소유하였다. 귀족과 더불어 교회는 지배계급으로서 토지와 토지에 수반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봉건시대 초기는 자급자족의 소비경제시기였고 이 당시 주시(수도원이나 성 바깥, 근처 소도시에 위치)는 지역 차원의 한정된 국지적 시장이었다. 왜냐하면 도로 조건이 열악(강도, 시설 기반 열악)하였고 화폐 부족, 통일된 화폐가 없었으며 도량형도 통일되지 않았다. 그런데 11세기부터 시작된 성지 수복이라는 진실한 열망보다는 특정집단의 이익에 바탕을 둔 십자군 전쟁은 중세의 질서에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의 세력 확장 욕심, 비잔틴 제국의 이슬람세력 방어, 채무 탕감과 토지, 부에 대한 열망을 노린 귀족과 기사, 상인들의 상업이익 추구로 시작된 전쟁은 12세기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해외 상품에 대한 욕구(수요)의 증가는 정기시의 등장시켰고 세계에서 오는 모든 도매상품을 취급하였고 그로 인해 금융 거래도 활발하였다. 또한 상업의 발달은 상품 교환을 쉽게 하기위해 화폐사용을 증가시켰고 화폐의 증가는 다시 상업의 촉진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업의 발달은 상업도시(이탈리아, 네들란드)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처음에 이들은 성곽 밖에 자리를 잡았지만 차츰 세력이 성장하면서 방어벽을 구축하였고 이윽고 구래의 성시도 흡수하였다. 도시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봉건제의 규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는 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관행이었지만 도시의 상업 활동은 자유롭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도시민(상인들)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토지의 자유(소유, 처분, 저당의 자유), 활동(이동)의 자유, 자신들의 법정(재판), 도시 치안, 세금 완화 내지는 스스로 과세를 원하였다. 상인들은 봉건제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길드와 한자로 뭉쳤다. 때로는 평화적 방법 뿐만 아니라 폭력적 방법이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재판소, 형법 등등을 통해 차츰 영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서 나갔다.

 

어려운 상황의 사람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것을 죄악시 했기에 중세시대 교회에 의해서 대출 이자 및 노력이상의 매매차익을 노리는 상인의 상행위는 비난을 넘어 범죄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정작 교회는 이자 수입을 챙기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교회법과 상인들은 대립하였지만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질서 앞에 교리는 서서히 수정, 사멸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자수입은 차츰 합법화의 단계로 나갔다. 신념, 법, 생활양식, 인간관계 이 모든 것이 사회가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면서 수정되었다. 맑스는 국가나 법률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제, 토대의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토대 상응해서 상부구조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방금 보았듯이 봉건제의 상부구조를 뛰어 넘는 생산력의 발전은 결국 거기에 조응하는 새로운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도시의 발달은 도시와 농촌의 분업을 낳았고 곡물의 수요도 증가시켰다. 그래서 농촌은 집약적 생산(단위당 수확량 증가), 조방적 생산(토지 확대)으로 농업 생산은 크게 늘었다. 특히 조방적 방법을 통한 개척 운동은 농노에게 부역 대신 화폐로 대신하는 화폐지대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노입장에서 토지 개척이나 화폐지대는 부의 증가와 인격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모든 영주가 화폐지대를 찬성하지 않았고 구질서를 강력히 옹호하였고 이는 농노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농노 노동의 가치는 크게 증가(화폐지대로 전환, 농업 노동자 임금 상승)하였고 이는 농노의 자유를 크게 신장시켰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영주들의 봉건질서에 대한 집착은 강력하다. 토대에 상응해서 상부구조가 형성되지만 낡은 상부구조는 새로운 물적 기반을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질서를 철저히 배격기 때문이다.

 

수공 기술자는 처음에는 영주의 장원에 머물렀지만 상업의 발달에 따른 화폐 사용 증가와 도시의 성장에 따라 도시로 이주 작업 도구를 소유하고 타인의 수요 충족을 위해 시장에 수공업품을 판매까지 하였으며 수공업 길드를 조직하였다. 도제와 직인, 장인 체계로 된 초창기 수공업 길드는 도제가 장인으로 까지 승진이 가능하였기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조합원 복지(실업 연금, 노후 연금), 상호 협동, 불공정 거래 금지를 준수하였다. 하지만 도제에서 장인으로 승진이 막히고 장인내 빈부 격차는 길드를 점차 분화시킨다. 아무튼 초창기 수공업 길드는 원자재 가격과 노동 시간을 고려한 공정가격을 엄수하였다. 공정가격은 변화가 적은 지역적 시장경제에 적합하였지만 상업의 발달은 다양한 판매자와 구매자의 등장, 외지 상인과 상품이 등장하면서 공정가격은 시장가격(공정가격+초과 이윤)으로 대체된다.

 

10세기에서 15세기의 상업 발달은 중간 계급 상인을 등장시켰다. 이들은 상업 거래 지속성과 안전성을 위해 질서 유지를 원했지만 이윤 추구의 활동은 필연적으로 봉건적 속박과는 충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봉건영주와 기사는 전쟁, 약탈, 영주의 세금 등등 혼란만 가중시켰다. 도시는 영주와 맞서 싸우고 이때 국왕은 도시의 강력한 동맹자로 위치했다. 이런 배경에서 국가는 탄생하였다. 국왕은 군대 유지를 위해서 도시로부터 세금을 거둬 들이고 빚도 얻어 썼다. 그에 대한 댓가로 질서 유지, 도량형의 통일, 언어와 법의 통일을 이룩했다. 세금이 영지 수입을 대체하면서 자연히 상공업 진흥에 관심을 가졌고 지역 독점 조직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길드는 팽창하는 상공업을 속박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길드를 규제했다. 국가의 승리는 오히려 중간 계급 전체에게는 이익이었다. 국가입장에서 이제 마지막 남은 최대 봉건 지주인 교회와 대립은 불가피하였다. 교회의 교리와 실천은 괴리가 심하였고 교회의 폐해와 타락, 부패는 점입가경이었다. 교회가 독점하던 교육은 점차 독립학교의 증가로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었고 전쟁방지의 역활도 국왕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종교개혁은 신흥 계급이 봉건제에 맞선 최초의 전투였다. 이 시기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종교이상의 개혁은 목표로 하지 않았기에 지배계급의 지지를 획득했고 민족주의에 호소 국민국가의 이이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입장에서 주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국왕의 주화량을 증가시키지만 물가 상승의 압박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주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주화속에 금, 은량을 줄이는 것이며 이는 예전의 양화로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물건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난한 자나 고정 수입자에게는 고통이었다. 아무튼 상업발달은 더 많은 금/은이 필요했고 더 많은 금/은은 다시 상업발달을 촉진했다. 상업혁명은 새 항로의 발견을 통해 지중해 중심 무역에서 대서양 중심 무역으로 옮기면서 대외무역을 활성화 시켰다. 이 당시 자본을 모으는 방법으로 주식회사가 등장했으며 금융업 또한 활성화한다.

 

새 항로의 발견을 통해 아메리카에서 무수한 금과 은이 유입되고 금/은의 유입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 물가상승은 상인과 농민중 과거에 정한 지대로 오랫동안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이득이였지만 고정된 수입에 지출이 증가한 국가나 임노동자, 금리 생활자, 지주는 손해를 보았다. 지주는 손해를 만해하기 위해 엔클로저(울타리치기)와 가혹한 지대를 징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임노동자화 하였다.

 

길드는 지역적이고 작은 시장에 적합하였다. 초창기 장인들은 생산자, 상인, 고용주, 작업 반장, 상점 주인의 5중 역활을 하였다. 하지만 원재료 구입과 판매를 맡는 중간 상인의 등장으로 성립한 가내 공업 제도(선대 제도-중간상인이 여러 장인을 고용하여 원자재를 공급 각자의 집에서 일하게 한 방법)에서 장인은 더 이상 독립된 존재(장인은 생산만 담당)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수요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는 적은 생산비로 많은 생산량이 요구 됨에 따라 분업의 필요성이 증가했지만 길드의 장인은 당연히 반대하였다. 이에 중간상인들은 차츰 자본가화하면서 장인/직인은 자기 집에서 일하고 스스로 노동시간을 정하고 생산도구를 소유했지만 점차 단순 수공 노동자화 하였다.

 

이 시절 부는 금, 은의 귀금속이였고 금, 은을 가지지 못한 국가는 무역수지흑자로 금, 은의 양을 증대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공업의 장려를 통해 좀 더 값비싼 공산품을 수출 품목으로 정하였다. 이른바 중상주의 관점이다. 그 당시 공업 장려 수단으로 보조금 지급, 보호 관세, 외국 숙련 노동자 유입 장려, 새공정 개발, 발명에 대한 독점권 부여 등이다. 중상주의의 보호정책은 식민지는 종주국의 수입원으로 즉 보조자로만 존재하도록 하였다. - 식민지에서 원자재를 제국으로 가져와서 가공 생산하여 수출하는 방식에서는 식민지는 착취의 대상에 불과하였다. 상인의 이익은 국가 이익과 일치되므로 경쟁국의 손해는 자국 이익 증진으로 생각했기에 전쟁의 발발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상주의에서 소수의 독과점은 이득을 얻을 수 있으나 다수는 빈곤 할 수 밖에 없다. 1776년 미국 독립 선언, 국부론(생산성 증대는 분업을 통해 일어나고 분업은 시장의 크기에 따라 커지거나 줄어든다. 즉 시장은 자유무역을 통해 최대로 확장된다.)은 중상주의에 대한 반란이다. 중상주의 규제에 대한 반발, 독점에 대한 반발 그리고 자유무역에 대한 요구는 점차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국부론 전에도 중상주의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흄이다. 그는 국제무역이 금 보유량을 조절하고 물가도 조절 그래서 수입과 수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물가가 상승하면 수출품의 가격도 상승하여 수출이 감소하고 그 결과 수입은 수출을 초과하고 금이 유출된다. 그런데 금의 유출은 물가를 하락시키고 그러면 수출은 다시 늘어난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물론 현실에서는 많은 변수가 있고 단기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작동하지만 금/은 등의 귀금속을 부의 원천이라고 강조한 중상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반박이었다. 특히 프랑스 중농주의는 정부의 규제, 간섭, 구속을 철폐하고 자유방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개인의 권리, 자유를 바탕으로 한 토지재산의 신성한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프랑스 중농주의자는 농업 노동이야말로 유일한 생산적 노동이며 농업은 진정한 부를 증가 시키기에 토지 재산을 신봉하였다. 무엇이든 생산, 판매가 가능해야지 재산권을 향유 할 수 있다며 자유무역을 주장한다. 즉, 완전한 자유만이 재산권 향유의 필수 요건이고 재생산을 최대화한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봉건제에 대한 모순에서 비롯되었으며 봉건제도의 폐지 및 자유와 평등 사상을 유럽에 전파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혁명전 프랑스에서 성직자, 귀족은 1, 2신분으로서 면세와 각종 특권을 지닌 계급이었다. 반면 3신분 민중은 부르주아, 장인, 농민 등으로 구성되었고 세금 납부, 십일조, 봉건 부담금 납부 등의 각종 의무만이 있었다. 특히 농민은 자기 수입의 80%를 납부하였다. 이런 구제도의 모순으로 혁명에는 부르주아 뿐만 아니라 농민, 장인의 적극 참여가 있었다. 특히 농민, 장인은 실제 전투의 대부분을 수행했지만 최대 이익을 얻은 것은 부르주아였고 ‘자유, 평등, 우애’의 혁명 구호는 부르주아에게만 해당되었다. 나폴레옹 법전을 보더라도 부르주아의 이익은 있지만 노동자, 농민의 이익은 외면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현재도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가장 대표적인 제도로 대의제, 삼권분립 등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여기에 참여가 가능한 계급은 부르주아밖에 없는 부르주아 독재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보다 더 많은 다수에게 민주주의가 확대되는데도 흔히들 비민주적이라고 오해를 하는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더 많은 다수에게 민주주의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사회주의가 비민주적이라는 주장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악의적인 왜곡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