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1789∼1871(노명식 저)

연이야 2011. 8. 7. 22:26

혁명전 18세기 프랑스의 사회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성격 및 이후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전제가 된다. 프랑스는 1730년 이후부터 1775년까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상인과 부르조아의 토지 매입은 꾸준히 증가하면서 귀족 몰락을 부채질한다. 그리고 물가 상승은 빈부격차의 심화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1775년부터 대가뭄, 한해 등으로 흉작이 되면서 식량위기와 곡물가 상승으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실업이 증가 불황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사회적으로는 1신분 성직자, 2신분 귀족, 3신분 그 외 전부로 구성되어있다. 성직자는 귀족 출신의 상층 주교와 하급 사제, 조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층 주교는 교구 재산, 십일조, 봉건영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하급 사제와 조제는 주로 3신분 출신으로서 이해관계와 이념에서는 3신분과 유사하다. 이들의 영향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가 가능했다. 귀족은 대검 귀족인 구귀족과 법복 귀족인 신귀족으로 나뉜다. 구귀족은 중세이래 봉건 귀족이며 왕권강화에 따라 정치력은 약화 되지만 호사생활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 신귀족은 부르조아 출신으로 법 지식과 행정능력을 가지고 행정, 사법 관직을 차지하였다. 이해관계에서는 구귀족과 대립하고 있다. 3신분에서는 농민이 전체 인구의 ⅘를 차지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소작농 내지는 날품팔이 농업 노동자였고 극소수만이 자작농이었다. 또한 부르조아의 상층은 귀족화하고 있었고 하층은 국가 재정 부담에 허덕였다. 도시노동자는 아직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아서 노동자 계급 의식은 아직 미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특권 계급은 세금을 면제 받고 있었다. 반면 농민과 부르조아는 봉건 공조 및 국세의 이중 부담을 지고 있었다. 농민들은 수입의 80∼90%를 세금으로 낼 정도였다. 농민들은 앙시앵레짐에 대한 불만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농촌 교회의 사제에 의해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혁명의 지지와 참여를 하게 된다. 행정은 권한과 업무가 중첩되면서 일관성이 결여되었다.

 

이런 가운데 혁명의 원인은 귀족의 반동과 왕의 무능, 재정의 악화였다. 귀족은 허영과 사치, 나태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토지 수익을 늘리려고 봉건 공조 강화, 귀족 특권의 고수, 국가 요직 독점의 반동을 일삼았다. 루이 16세의 무능과 무책임은 귀족의 반동을 부추겼고 이는 왕권의 약화를 야기했다.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 지원과 1786년 영•불통상조약으로 프랑스 공업이 타격을 받고 곡물 가격 폭등을 야기했다. 이에 루이 16세는 특권계급 조세 문제로 삼부회 소집을 결정한다. 하지만 선거 절차와 방법, 표결 방식의 이견은 충돌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드디어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고 예견된 1, 2신분과 3신분의 의견 대립으로 ‘국민의회’가 탄생된다. 이후 테니스코트 서약(성문 헌법 제정), 바스티유 습격이 이어지면서 프랑스 국민 대표로 승인된다. 이후 혁명은 전국 곳곳에 전파 되고 부르조아 주도로 지방 도시의 행정, 치안을 구성하고 농민들의 봉건 문서 파기, 반란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운동으로 발전된다. 하지만 국민의회는 농민 문제에 무관심하였다. 농민들의 봉건 신분은 해방되었지만 토지는 농민에게 귀속되지 않았다.

 

1791년 9월 30일 국민의회는 해산되고 입법의회가 10월 1일 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식료품 가격 폭등, 성직자 민사 기본법에 따라 주교와 사제도 선거 위원회에서 선출되는 공문원 신분이 되었고 헌장 준수 서약 의무를 규정하였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거부하였고 이들에 의한 소요, 귀족들의 군사적 위협 프랑스 오스트리아 간 전쟁 패배에 직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와 파리코뭔의 대립, 집권파 자코뱅당 내 지롱드와 산악파의 분열은 부르조아 이해관계와 민중 이해관계의 대립이었다. 파리코뭔과 산악파가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생산수단의 소유 없는 자유는 공허한 공염불에 불과 하다며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9월에 국민공회가 소집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제거 되면서 혁명은 후퇴되기 시작한다. 물가 폭등, 식량 부족, 반혁명분자 석방, 자코뱅당에 대한 테러가 일어나고 왕당파의 활동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1797년 4월 선거에서 왕당파가 대거 당선이 된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총재정부는 나폴레옹 군부의 힘으로 왕당파를 제거한다.

 

나폴레옹의 제국은 프랑스 통일, 앙시앵레짐 말소와 귀족과 성직자는 부와 권력을 상실하지만 부르조아는 토지를 더 많이 획득하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은 왕정의 복고시키고 반혁명 정책을 강화한다. 결국 반혁명의 정책은 1830년 7월 혁명의 원인이 되고 왕권의 축소와 혁명 이념의 승인이라는 결과물을 얻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제부터 혁명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과 혁명은 달성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립한다. 그리고 1840년대는 외관상 번영을 누렸지만 노동자의 삶은 비참하였다. 특히 1848년에 오면 외교 실패, 곡물가 폭등, 수요 감소, 임금 하락, 실업 증가, 주가 폭락으로 중소 부르조아와 노동자 주축이 되어 2월 혁명이 일어난다. 2월 정부는 노동위원회 건립, 국립 작업장 건설, 보통 선거 실시를 한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보통선거 실시로 혁명 달성과 노동 조건 개선 등 사회 개혁까지 가야한다는 시각이 맞서고 있었다. 이후 좌익 쿠테타 실패로 반동적 조치가 취해지며 대선을 통해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으로 제 2제국이 건설된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전쟁 패배 왕당파에 의한 채무 즉시 이행, 국민 방위군 일당 지급 정지 등의 반동적 정책은 1871년 3월 파리 코뭔으로 가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되지 않은 코뮌은 집행권의 혼선, 파리 방위대 지휘선의 혼선은 베르사유의 티에르에게 귀중한 시간을 주었고 결국 단명으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