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휴버먼의 자본론

연이야 2011. 10. 10. 14:12

 

 

 

휴버먼의 자본론 앞부분은 자본주의에서 이윤이 창출되는 구조 그에 따른 자본의 축적 그리고 독점의 필연성과 그 결과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의 불가피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아래 식은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아래 식에서 △M을 창출할 수 있는 화폐이다.

M

-

C

-

M′

 

 

생산요소

기계

 

노동력

 

M+△M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생산요소의 구매가 필요하다. 이때 상품의 교환가치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생산조건, 노동강도, 숙련도 고려)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한 사람이 8시간 노동시 자신이 일한 노동의 가치만큼 가져간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이윤은 없다. 하지만 자본가는 노동력의 가치 만큼만 준다. 즉, 노동자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생계수단의 가치이다.

 

 

ǀ                                                                    ǀ

8시간

 

노동력의가치(임금)                   잉여가치

ǀ                                  ǀ                                ǀ

필요노동시간 4시간    잉여노동시간 8시간

 

 

노동자의 노동시간에는 이처럼 자신의 임금이 되는 필요노동시간도 있지만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잉여노동시간도 포함되어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착취가 분명히 눈에 보였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렇듯 숨겨져있다. 아무튼 자본가는 상품의 가치그대로 판매를 해도 이윤은 발생하게 되어있다.

 

1870년을 기점으로 자유경쟁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화 했고 과잉생산으로 인한 시장과 원재료 확보를 위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제국주의단계로 나아갔다. 과잉생산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제국주의로 단계로 까지 갔지만 자본주의에서 공황은 주기적으로 발생하였다. 홉슨은 공황의 원인은 부의 불평등한 분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부자의 부가 증가하고 모두 소비되지 않고 저축의 증가로, 투자의 증가, 생산의 증가 그로인한 과잉생산 때문이다. 공황의 해결을 위해 임금 상승 및 사회복지확대를 통해 수요확대를 주장했지만 임금상승은 단기적으로 생산이윤을 감소시킨다. 반면 하이예크는 임금 하락, 복지삭감을 통해 생산 이윤의 증가만이 공황을 해결하리라 봤다. 하지만 임금 하락은 수요의 축소에 부딪힌다.

 

마르크스는 이 딜레마에 의해 공황이 발생하고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공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봤다.

M

-

C

-

M′

 

 

생산요소

기계(c불변자본)

 

노동력(v가변자본)

 

M+△M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불변자본의 비율은 증가하지만 가변자본의 비율은 축소된다. 앞에서 봤듯이 불변자본은 가치 증가 없이 그대로 이전된다. 가변자본이 가치를 창조하는데 가변자본의 축소는 결국 평균 이윤율은 점진적으로 하락한다.

C

c(불변자본)

v(가변자본)

s(잉여가치)

1500

1000

500

500

4000

3000

1000

1000

 

이윤율 하락 경향은 자본가에게는 투자된 총자본(C)에 대한 이윤으로 간주 s/C 즉, 자본가의 자기 이윤율로 나타난다. 그래서 500/1500→33.3%, 1000/4000→25%로 이윤율은 줄어들지만 이윤량은 500에서 1000으로 증가했다. 이를 위해서 가변자본은 2배, 불변자본은 3배 증가했다. 즉, 이윤량 증대를 위해서 자본가는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저임금을 유지해야한다. 결국 축적의 증가는 생산의 증가로 이어지지만 노동자의 구매력은 낮아져서 자본주의에서는 공황은 해결이 불가하다.

 

뒷부분에서는 자본주의의 비효율성, 불합리성에 대해 설명하고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각자의 사익을 추구하면 공동체 전체는 윤택해진다고 자본주의는 말한다. 하지만 1870년대 이후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함으로써 이는 진실과는 먼 얘기이다. 국가 안전, 이익 보다 소수의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은 필연적으로 낭비와 과잉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례는 2차 대전 후 미국의 건설산업, 철강산업의 이윤 추구가 다수의 필요와 대립된 예를 비롯해 무수히 많다. 그리고 각 사업체 내부는 조직, 시스템, 계획이 갖추어 졌지만 각 사업체 사이에는 계획이 없다. 그래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얼마나 소비하고 저축해야 되는지는 소수의 독점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불안정 즉, 과잉, 실업, 공황이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실상은 이렇듯 비합리적이고 불안정하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발생시키고 자유의 불평등을 낳는다. 노동자는 생계유지를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노동조건이 불리하더라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는 노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이윤을 독점한다. 물론 자본가는 투자 위험 감수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기회의 불평등,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 까지 확대된다. 즉 생산수단 소유 유무로 나타난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경제체제든 탄생, 발전, 쇠퇴의 운명을 지닌다. 생산력이 억제 당하고 방해 받는다면 이는 쇠퇴의 시기이다. 생산능력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소비능력은 미처 이를 따라 갈 수 없다. 이윤 추구 목적인 생산에서는 구매력이 떨어지는 노동자에게 상품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풍요속 빈곤이 나타난다. 특히 독점자본은 독점이윤을 위해 산출량을 줄이거나 독점 가격 형성, 새로운 발명 억제, 경쟁 제한을 한다. 결국 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새시장, 새투자처를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비고 이는 제국주의 전쟁, 각국의 금융위기로 나타났다. 독점 자본주의화 하면서 개별생산에서 집단적 생산 즉, 생산의 사회화는 확대되지만 소유의 사유화로 인해 모순은 격화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이윤이 목적인 생산이 아닌 필요와 욕구 충족을 위한 생산을 해야한다.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와 계획에 따른 생산인 사회주의는 오웬, 생시몽, 푸리에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이윤 추구의 무한 경쟁은 자본주의 특징이고 이에따라 빈부격차, 이기심 팽배, 전쟁 발발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므로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자들 스스로 힘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보다는 부르조아에게 호소, 선의와 상호 이해를 통해 도달하려고 하거나 사회적 실험 공동체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 몽상가들이 왜 실패했는지 명확하다. 가진 자들은 스스로 자기의 부와 권력을 내놓는 일은 절대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대안은 동일하지만 역사, 경제, 사회 발전에 바탕을 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부르조아에게 호소하는 대신 노동계급에 기대를 걸었다. 물질적 삶의 양식은 사회, 정치, 이데올로기 전반을 지배한다. 즉,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낡은 생산양식 상부구조는 새 생산양식에 더 잘맞는 계급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즉, 계급투쟁이 역사발전의 실체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성숙기는 경제 발전이 변화를 일으킬 만큼 성숙되어 있고 노동계급의 조직화, 계급의식의 고양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자본주의는 역사 발전의 한 부분으로써 주류 경제학자 어느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지만 일관된 방법으로 모든 위기를 설명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유토피아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의 해악을 치유해 줄 뿐이다. 공동의 혜택을 얻기 위한 집단 노력,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생산,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 제공, 경제 불안정 종식, 전쟁 종말, 계급/착취 폐지가 핵심이다. 노동에 대한 댓가는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 어느 정도 차이는 존재하지만 기회 평등을 제공한다. (공산주의는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는다) 이윤추구 경쟁에 따른 혁신도 있지만 반혁신(대체에너지 시장 진입 실패, 특허를 통한 기술발전 억제)존재한다. 하지만 이윤추구 경쟁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더 효율적이고 혁신적으로 임무를 수행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소유욕이 많고 이기심이 팽배하다고 하지만 이는 각 사회마다 욕망을 채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즉 이기적이고 탐욕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모습이다. 이타적인 사회에서도 욕구는 있지만 욕구를 채우는 방식이 자본주의처럼 이기심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흔히 사회주의에서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가장 왜곡된 정보 가운데 하나이다. 고전적 의미의 자유(소극적 자유)는 ∼로부터 자유(혹은 규제 철폐)이다. 하지만 ∼로부터 자유는 뭔가 할 수 있다는 기회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현대적 의미의 자유(적극적 자유)는 적절한 의식주, 욕구를 채워줄수 있는 경제능력, 교양/인격 수양의 기회, 개성 발휘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봤을 때 빈부격차가 심한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으면 자유를 누릴 수 없고 자유는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하다. 사회주의는 소수만이 아니라 다수가 자유를 누린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서 박탈당하는 자유는 다수의 안전, 환경, 공익보다 소수의 이익만 소중히하는 자본가의 자유뿐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가의 자유와 노동자의 자유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사회주의 혁명은 단지 권력자 몇몇만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가 계급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계급 대체와 부르조아 독재를 끊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최대다수 인민의 지배권 확립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보다 더 민주적이지만 완전한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완전한 민주주의가 성립되기위해선 계급이 폐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