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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불만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⑥

연이야 2013. 5. 15. 21:07

-경제 번영과 점진적 사회주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노동 계급이 거둔 성과와 제국주의적 분할로 사회주의 운동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상승했지만 평균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가령 영국 노동자들의 40%는 여전히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는 사회주의자들이 평화롭게 권력을 획득할 수 있고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반면 더 전투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정부의 계급적 본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계속 받아들이고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 독일 제국의 최대 정당으로 부상했다. 그 결과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복지와 정치권력을 모두 꾸준히 평화롭게 향상시킬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은 경제 분석에서 정통 신고전파 효용 이론을 활용했다. 노동자는 생산한 것과 같은 양을 받으며 자본가 역시 자본을 가지고 생산한 것의 가치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불공평의 원인을 소유에서 나오는 소득이 극소수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공평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정부 소유를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보편적 참정권에 입각한 의회 민주주의에서 국가는 중립적인 기관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활용해서 사회 체제와 경제 체제를 자유롭게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페이비언주의자중 한 명인 조지 버나드 쇼는 극단적인 엘리트주의 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신뢰하지 않았고 효율적이고 정의롭게 조직되려면 정책 결정과 행정 업무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부부는 사회주의에서 소유는 기업 활동과 이 활동에 영향을 받는 인구 규모에 따라 국가 이외에도 소규모 지방과 지역의 행정 단위에 귀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부부는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많은 글을 썼지만 기존 사회를 그런 미래의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는 데 필요한 전술에 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부는 대중들에게 지적인 호소를 통해 궁극적으로 일반 대중의 여론에 변화가 일어나면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국회의원 당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에 비견할 만한 집단은 수정주의자들이었다. 사회민주당은 명목상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지만 당원의 대다수는 수정주의 입장을 지지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모든 산업에서 소수 거대 기업의 수중에 집중된다는 마르크스의 견해는 틀렸고 주식 분배를 통해서 인구의 대다수가 소자본가가 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민주화되면서 혁명의 가능성은 줄었고 꾸준한 진보가 노동 계급의 희망이라고 봤다. 마르크스와 베른슈타인의 가장 큰 차이는 국가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국가는 계급 지배의 도구라고 본 반면 베른슈타인은 중립적 조정자의 기능으로 보았다.


즉 페이비언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은 개혁 입법을 끈질기게 추구하면 결국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개혁이든 유산 계급의 특권과 특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되면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경제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잠식되는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위협과 탄압에 호소할 것이고 결국 노동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폐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노동 계급은 혁명을 준비해야 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어렵게 얻어낸 각종 양보와 개선을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페이비언 협회의 철학이 지배하는 영국 노동당과 수정주의자들이 장악한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점점 보수주의화하면서 1950년대에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추구하는 정책을 공식 포기하고 빈민들의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개혁 입법만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달성하는 수단의 전부라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점진적이고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사고를 둘러싼 논쟁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서 사회주의가 취해야 할 대응의 성격을 둘러싸고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분할이 생겨났다.


이 시기 홉슨은 ‘제국주의 연구’를 통해 제국주의는 하급 인종이 차지한 지역을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투쟁이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국내에서 생산했지만 충분한 국내 수요를 찾지 못한 상품과 자본의 시장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제국주의의 경제적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해결책은 공평한 소득 분배를 실현할 만큼 충분히 급진적인 개혁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페이비언 협회내 조지 버나드 쇼가 이끄는 친제국주의 분파는 후진국들은 자국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고 나라로 간주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유럽의 선진국들에게는 이 후진국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 그 나라의 국내 문제를 관리하고 단속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 역시 ‘야만인들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관해 조건부 권리만을 인정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고등 문명이 더 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만장일치로 비난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축적’에서 자본가는 주어진 화폐를 가지고 상품(노동력)을 구입해서 다른 상품(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만든 상품)을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자본가는 잉여가치 또는 이윤을 얻는다. 그런데 잉여가치가 존재하려면 상품 판매에서 나온 수입이 원료와 재공품에 지출하는 비용과 임금을 초과해야 한다. 그 차이의 일부는 자본가들의 지출로 충당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지출은 잉여가치의 작은 부분만을 구성한다고 봤다. 또한 자본가들은 미래에 생산을 확장하기 위해서 원하는 자본재를 구입할 수 있지만 생산을 확장하려는 욕망은 소비재의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를 조건으로 하는데 문제의 핵심은 이런 소비재에 관한 수요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자본주의 내부에서 지출은 잉여가치를 계속 실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계속 확장해왔고 이런 확장의 추가적 지출의 원천은 비자본주의 지역으로 계속 확장하고 이 지역을 자본주의의 지배로 끌어들이며 자본주의적 관계의 영역안으로 통합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제국주의 경쟁은 비자본주의 지역의 규모가 줄어들면서 제국주의의 불법성과 폭력, 침략으로 충돌이 커진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과소 소비라는 그릇된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수익성 좋은 투자 배출구를 찾으려는 요구가 제국주의를 추진하는 동력이다.


레닌은 자본주의 발전의 제국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독점에 철저하게 지배되며 여기서 말하는 독점이란 트러스트, 카르텔, 기업 연합, 소수 대기업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국주의 단계는 금융 자본의 시대이기도 하다. 은행들은 막대한 자금을 투자를 위해 동원할 수 있지만 국내 이윤율이 계속 하방 압력을 받기 때문에 투자 출구는 해외에서 찾아야 한다. 홉슨과 달리 레닌은 상품 수출 보다는 자본 수출이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원인이라고 봤다. 자본주의 체제가 제국주의의 추진력을 지탱할 수 있는 한 잉여 투자 자금의 배출구를 제공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제국주의가 본국에 초과 이윤을 확보해주는 덕분에 노동자들의 임금도 오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혁명적 잠재력이 약하고 우파 노동 지도자들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제국주의 단계에서 생기는 긴장과 충돌은 경쟁 자본주의의 긴장과 충돌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레닌은 믿었다.


-케인스 경제학과 대공황

미국은 1920년대 경제적 번영을 누린다. 그러면서 세계적으로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도 주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번영도 1929년 10월 기점으로 곤두박질친다. 특히 흑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은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생산이 갑자기 줄어들었을까? 그 답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에 관련된 결정은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이라는 기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한다. 기업은 주어진 생산 기간에 일정 액수의 상품을 생산한다. 기업은 이 상품을 판매한 수익으로 생산 비용을 지불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기업의 생산 비용은 개인이나 다른 기업의 소득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산 가치가 생산 비용과 이윤으로 소모되고 이 모든 게 소득이기 때문에 생산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면서 발생하는 소득과 같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이 생산한 상품을 모두 팔려면 사람들이 소득을 전부 다 지출해야 한다. 케인스는 이것을 ‘순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순환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순환에는 유출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소득을 모두 지출하지 않고 은행에 저축한다. 또 다른 두 가지 유출로는 첫째, 수입품 구입 그리고 세금이다. 그러나 수입은 수출로 상쇄되고 세금은 정부가 상품과 용역 구입 자원으로 사용, 저축은 투자로 상쇄할 수 있다.


케인스는 이 과정이 계속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의 총소득이 증가하면 총저축은 그것보다 더 큰 비율로 늘어나고 따라서 투자가 저축을 상쇄하려면 소득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만 성숙한 사기업 경제에서는 수익성 좋은 투자 출구의 수가 제한되어 충분한 투자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투자가 저축을 따라가지 못하고 상품과 관련된 총지출이 생산된 것의 가치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재고가 쌓이고 다음 주기에 생산을 감축하고 연이어 고용과 소득이 줄어들면서 하향 나선 운동이 계속된다. 이 과정이 계속되다 보면 소득 감소로 저축이 줄어들어 결국 하락한 투자 수준과 비슷해지는 지점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균형을 이루지만 고실업과 상당한 양의 생산 능력이 활용되지 않는 수준에서만 가능하다. 이 문제에 대한 케인스의 답은 저축이 투자를 초과할 때 정부가 개입해서 잉여 저축을 차용하고 이 돈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사업에 지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의 지출은 지출 흐름에 투입을 증대하고 완전 고용 균형을 달성할 것이다. 케인스의 분석은 마르크스, 홉슨의 분석과 비슷하지만 케인스가 독창적으로 기여한 점은 저축과 소득의 관계가 어떻게 해서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실업이 만연하고 소득 수준이 낮은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이론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무기 생산을 늘리면서 실업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오히려 극심한 노동력 부족 상태로 돌변하면서 많은 경제학자들은 전시의 경험으로 케인스의 사상이 옳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생각했다. 정말 케인스의 경제 정책은 효과를 발휘했을까? 2차 대전 이래 대공황은 없었지만(2007∼2008 서브프라임 제외) 불황은 계속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호황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시작됐고 그 뒤의 지속적인 호황도 민간 경제의 수요보다는 군대와 밀접히 연관된 상황 속에서 진행됐다.


특히 미국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군산복합체가 성장하면서 미국 사회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위협하고 있고 이 덕분에 자본재 산업은 경제의 생산 능력을 높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다른 산업에 자본재를 공급하는 경우처럼 빠르게 생산 능력을 계속해서 완전 가동할 수 있었다. 경제는 군사 지출에 의존하지만 이런 지출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는 사라지고 있고 특히 약간의 군사 지출 감소는 바로 경기 정체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국은 국방 예산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적을 발견하려는 필사의 노력은 당분간은 대테러 전쟁으로 충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