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세계를 바꾼 아홉가지 단어

연이야 2013. 6. 23. 17:26

 

2강 진보

-생각 속으로

 보수주의란 인간과 사회에서 과거의 역사와 전통, 관습과 관행 같은 이미 알려진 경험적인 것을 중시하고 합리적 이성보다는 비합리적인 편견을 중시한다. 그리고 인간의 선천적 불평등함과 사악함을 인정하고 제도화된 기독교에 근거한 도덕 질서를 강조한다. 평등보다 자유를 강조하고 소수의 엘리트 정치를 주장한다. 사회 변화 발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매우 소극적이고 점진적이며 안정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기존 지배 체제 중심의 이념이다.

 20세기 현대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립하여 자유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자 신자유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세계화를 실현하고 있고 그 중심에 미국이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는 네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전통적 보수주의자들로 사유재산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도덕적 질서의 유지를 주장한다. 그래서 극단적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무제한적 자유 경쟁에 소극적이다. 둘째, 개인주의적 보수주의자들로 자본가 중심의 경제 체제와 무한 경쟁의 근거인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들은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주장하고 사회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지출하는 사회 복지 비용을 줄이고 개인들의 자선으로 빈곤을 해결할 것을 제시한다. 셋째, 신보수주의자로서 호전적인 반공 정책, 테러와의 전쟁,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의 수호와 회복, 국가의 시장개입 축소와 시장 경쟁의 강화, 노동의 유연성 강화, 복지 제도의 축소, 과감한 민영화와 규제 철폐 등을 주장한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혼, 동성애, 마약, 낙태, 도박, 포르노, 상업방송의 과잉화 등을 비판한다. 넷째, 기독교 우파로 높은 이혼율, 빈곤층 확대, 애국심 쇠퇴, 광범위한 마약 사용, 낙태의 합법화, 포르노를 위시한 성적 타락 등을 비판하면서 미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극복하고자 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근거해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서 초기의 정체성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경제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주장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보수주의는 전 세계 정치와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데 보수주의의 세계화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와 역사가 퇴보와 정체를 넘어서 진보한다는 역사에 대한 진보주의적 관점은 비코,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이 주장한 것이다.

 비코는 인류의 역사를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세 시대는 역사 속에서 순환을 반복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의 순환과 반복의 원동력은 인류의 정신이라고 했다. 칸트는 역사에는 일정한 발전 법칙이 있다는 법칙주의, 이성의 힘에 의해 점차 이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이성주의, 점차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주의를 주장했다. 헤겔은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운동하고 변화하고 발전 법칙이 존재하며 이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며 인간의 자유가 확대 발전하는 과정이며 자유의 실현이야말로 역사의 궁극적 목표라고 했다. 그리고 역사는 영웅적 인물을 통해 시대적 발전을 이끌어간다고 주장했다.

 칸트와 헤겔이 역사의 발전을 이성이라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 혹은 자기실현으로 해석하는 관념론적 역사관을 제시했다면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을 변증법적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는 유물론적 역사관을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에는 발전법칙이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경제적 토대가 정신적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계급투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과도한 이윤추구로 인해 주기적 경제 불황과 공황을 겪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필연적이고 사유재산 폐지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경제적 사회 구성체를 형성함으로써 인간 해방의 역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진보 사상은 노동자, 농민에게 많은 공감을 주었고 세계 여러 지역에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으나 마르크스의 예견과는 달리 소수 공산당 지배층의 독재 체제로 전락해 오히려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강화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후 1968년 프랑스의 ‘68혁명’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진보주의가 등장하는데 이는 국가와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정치, 경제 투쟁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여성, 소수자, 인권, 문화적 다양성, 환경 문제 등에 관심을 보였다. 현대 신진보주의는 옛 사회주의권의 낡은 진보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소수를 위한 형식적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다수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진보주의가 사회의 변화에서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역사 발전의 필연적 현상은 아니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억압하는 모든 곳에서 언제라도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5강 소비

-생각 속으로

 지우개는 100원인데 왜 연필은 200원일까?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초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통상은 노동시간으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한다. 한편 상품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이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노동을 통해서 발현되는 특성이 있다. 상품은 노동을 거치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탓에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노동은 곧바로 생산과 연결되었다. 이런 시대를 흔히 생산사회라고 한다. 이제는 생산물이 넘쳐나고 있기에 생산보다는 어떻게 소비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를 흔히 소비사회라고 한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가 생산 양식을 연구했다면, 지금은 소비행태를 보면서 대중의 심리와 취향 따위를 가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 르페브르 : 지금의 사회는 “소비를 통제하는 관료제 사회”이다. 이 사회 속에서 소비자들은 수동적인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며 소외(자기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진 상태)가 심화된다. 그리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양식(스타일)이 사라지고 획일화 되어간다. 즉 르페브르는 소비문화의 특징을 ‘양식의 종말’로 규정했다.

· 보드리야르 : 특정 상품을 소비하면 상류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런 식으로 소비되기 때문에 상품은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통해 생산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상품만이 아니라 예술,대중문화 또 인간의 몸에도 적용된다. 몸이 하나의 사회적 기호가 되어 아름다울수록 더 높은 임금과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결국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지위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혹은 기득권이 요구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르페브르는 양식의 복권을 주장한다. 보드리야르는 이 세계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언젠가는 폭발적인 힘에 의해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비관적이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6강 합리성

-생각 속으로

 독일 자본주의는 왜 영국처럼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는가? 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던 베버는 서구인의 종교와 문화에 깃든 정신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탈주술화, 곧 주술적 신앙이 지배하던 중세에서 벗어난 근대적 합리성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연 역사적 동력이다. 그리고 이런 합리성을 열어낸 주체는 소명의식을 중시한 칼뱅주의 개신교와 같은 청교도들이다. 자신을 강제하는 생활태도는 청교도의 소명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금욕 절약 저축과 같은 청교도적 생활방식은 자본축적과 재투자로 이어져 자본주의를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 후 세계로 눈을 돌린 베버는 동아시아의 합리성은 전통적(전근대적)합리성으로 규정한다. 동아시아 문화는 진보를 가로막는 전통주의, 기술과 전문지식을 천시하는 풍조, 조상과 미신에 대한 숭배, 혈연 위주의 자연적 인간관계, 수학과 추리능력 결핍, 무조건적 현세 긍정과 같은 특징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유교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공정한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잣대로 유교를 마름질한 것에 불과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발전과 제국주의 확장을 불가분의 관계로 본 근대 서구 지식인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는 베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편협한 서구 중심적 합리성은 근대 이후 세계 문화사에서 보편적 지위를 누려오고 있다. 지금까지 유럽 이외의 사람들은 그들 고유의 문화를 서구 문화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합리화(근대화)를 이룰 기회를 서구와 서구 흉내를 낸 아시아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제외한 세계인들은 그들의 빼앗긴 ‘근대’를 되찾을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서구 중심적 언어와 식민지적 세계관에 길들여진 동아시아인의 역사관과 문화관은 빼앗긴 근대성(합리성)의 빈자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리쩌허우가 보기에 계몽은 서구인과 자본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계몽과 이성은 18세기 서구에서 나온 사상이지만 그것이 오늘날 전 인류에게 보편성을 갖는 까닭은 자유, 진리, 평등, 정의와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계몽은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하여금 근대적 이성의 눈을 뜨게 해주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의 전근대성을 뜯어고치려면 유교 전통에서 큰 영향을 받는 중국인의 문화심리 구조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는 동아시아인의 삶과 문화에 적합한 합리성을 모색한다.

 리쩌허우는 동아시아의 정체성은 유교 전통에 뿌리를 둔 ‘실용이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인의 전통적 세계관은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둘로 가른 이원론적 세계관이지만 오랜 역사에 걸쳐서 동아시아인은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자연을 논하였고 노동과 실천을 통해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결합해왔다. 즉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역사 속에서 경험과 연관된 합리성이 바로 동아시아 전통적 실용이성인데 이는 곧 인간과 신을 둘로 가른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밑바탕으로 해서 나온 동아시아적 합리성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교가 중시한 중용이며, 이 중용이야말로 동아시아인들이 삶의 도구로 사용해온 실용적 이성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7강 오리엔탈리즘

-생각속으로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권력과 지식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서양이 동양을 인식하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이므로 지식의 문제이고 이런 지식과 인식은 동양을 지배하는 방식에 적용되었으므로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양인의 이미지는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이고 열들한 사람들로 왜곡되었고 이는 서양 권력자에게는 동양을 지배할 필요성을 제공했으며 동양인들에게는 서양의 지배를 스스로 합리화하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바루마와 마갈릿의 ‘옥시덴탈리즘’은 영국과 프랑스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독일과 러시아가 자신들의 전통적인 시각으로 반항했는데 거기서 부터 유래를 찾고 있다. 서양 문명의 특징을 상인, 도시, 합리주의, 계몽주의, 물질 숭배로 보았고 반서양의 특징은 영웅, 농촌, 신비주의, 낭만주의, 종교와 신으로 보았다. 근대 서양의 주역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삼은 상인이고 이를 위해 소비와 퇴폐의 도시를 구축했고 신을 위한 의무나 희생보다는 개인적 만족감과 경제적 안정을 통한 안일을 더 중요시했다. 바루마와 마갈릿은 가장 위험한 옥시덴탈리즘은 종교적인 것이며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세계를 흑과 백으로 나누고 절대악에 대항하는 성전의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관점은 서구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역사가 만들어낸 옥시덴탈리즘의 발생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모두 상대를 타자화하는 관점에서 동일하며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의 관점에서 동양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하는 서구 중심적 인식이고 옥시덴탈리즘은 동양인의 눈으로 서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긍정적으로 이상화하여 왜곡하는 관점이다. 한편 한국인에게는 서양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즉,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 섞여서 나타난다.

 이런 시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의 실체를 바로 인식할 수 없고 서양과 동양은 엄격하게 나뉜 이항대립의 개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사고방식을 인정하는 것은 인종차별, 문화차별, 국수주의, 맹목적 애국주의가 낳은 비민주주의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 세계의 민중이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이런 사고를 극복하는 길은 서로의 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역사와 현실 속으로

 대부분의 건설업체가 아파트 고급화 전략을 ‘유럽 본뜨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럽에서 아파트는 서민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의 거주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전략을 쓰는 이유는 서구 귀족의 삶이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자기고백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받아들여 이중적인 자세를 취했던 일본의 태도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과 서구를 제외한 이슬람 문화권이나 동아시아의 나라들은 미개한 나라라라고 우월감을 갖는다. 그들의 문화가 진정 어떠한 것인지 알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은 채 서양의 관점으로 이미 평가되고 재단된 눈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오리엔탈리즘이 깊이 내재하고 있다.

 한편 중국과 북한에서의 옥시덴탈리즘은 관변과 반관변으로 나뉜다. 관변옥시덴탈리즘은 대내적, 대외적으로 나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에 비해 중국이 더 우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서양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이용하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한다. 이런 점에서 북한역시 대내적으로는 내부 결속력을 강화하고 체제 비판적인 문제 제기를 사전에 봉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은 반정부 세력이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서구를 이상적인 사회로 왜곡하는 것이다.

 

8강 환경

-생각속으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자연 환경에 대한 더 많은 변형을 요구했고 결국 인류를 포함한 전 생태계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징후들은 이미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어느 한 지역,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관심사이다.

 다양한 생명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구라는 삶의 터전은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조화를 이뤄나간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양 필요할 때마다 임의로 이용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동물에 대한 착취이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종차별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런 차이를 차별이 아니라 다름이며 상호인정이며 인간 자신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동물의 이익 역시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와 현실 속으로

 투발루는 원래 남태평양에 있는 9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졌지만 두 곳은 바다에 가라앉고 7개만 남았다. 남은 섬들도 50년 후에는 영원히 사라질 운명이다. 그리고 2, 3월이면 국토 대부분이 바다에 잠기기 때문에 토양의 염분화는 상당히 진행되었고 그 결과 농사는 포기했고 식수는 부족하다. 이제 투발루 사람들은 환경난민이 되었지만 이웃 나라들은 투발루 국민이 이주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2004년 기준으로 미국 국민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9.7t이며 호주는 17.5t, 한국은 9.6t이다.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의 유엔 환경개발회의에서 기후변화협약이 채택된 이래 2005년 교토의정서가 발효되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선진국 중심으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이행해야 할 상황에서 미국과 호주는 돌연 교토의정서 서명을 거부하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은 기존의 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선진국의 지원을 받아 해당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이산화탄소를 감축해가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미국은 교토의정서 체제를 무효화하고 개발도상국까지 감축 의무에 포함하는 새로운 단일 의정서를 채택하자는 입장이다.

 결국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서 기후변화위원회 파차우리 의장은 육식을 줄일 것을 제안했다. 유류의 생산이 교통수단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육류 생산에 나오는 직접적인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18% 정도이다. 이처럼 갈수록 증가하는 육류 소비가 미래의 지구와 인류 행복을 위협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고 소박한 밥상 앞에 앉는 일이 지구의 건강을 회복하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9강 문명

-생각 속으로

 문명은 한편으로는 물질문명 같은 용어에서처럼 인간의 영역 혹은 인간의 창조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인간다운 가치와 방향이라는 의미도 있다. 가령 1994년 4월부터 6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르완다 인구의 11%, 투치족의 75%나 되는 80만 명이 순식간에 학살된 사건을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이라 말할 때의 의미가 그러하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자본주의의 승리가 명확해진 이상 세계는 더 이상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경제적 가치가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문명 간의 갈등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을 했다. 여기서 문명은 언어와 종교 등 여러 가지 문화적 특질들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있는 문명권을 의미한다. 이때 문명권을 구분하는 가장 일차적인 기준은 종교이다.

 이에 뚜웨이밍은 ‘문명들의 대화’에서 문명들 사이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의 가치 ‘서’의 덕목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원리에 입각한 ‘서의 윤리’는 개인 간은 물론이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평화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데에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관계 방식이다. 이를 통해 문명 간 갈등과 오해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르티아 센은 ‘문명충돌론’에 대해 종교를 기준으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어떠한 문명이나 문화의 집합체로 간주한다면 젠더, 직업, 언어, 과학, 도덕 등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과 그 가치는 무시된다. 센은 한 사회가 지닌 다양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하고 각 개인을 상자 속에 가두는 폭력적인 방식이라고 경고한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부자와 가난한 자, 여성과 노약자, 소수자와 같은 이들이 받는 부당한 차별과 억압이 은폐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문명은 자연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야만과 구별되는 인간다운 품격을 지닌 삶과 사회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 서구 문명의 단계에 들어서면서 자연세계를 물질로 간주하고 파괴를 자행하면서 자연과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 문명은 인위 혹은 작위의 산물로서 인간의 고유한 창조물이라는 비판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대인의 지혜를 다시 떠올려 문명은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그 무엇이고 폭력과 전쟁, 기아와 질병을 인간의 삶에서 몰아내고 인간다운 삶을 꾸려가는 행위와 산물을 다시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