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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교양인을 위한 오세철 강의➂

연이야 2013. 6. 25. 21:18

 

5강 21세기 사회변혁의 실천 방향

지금의 공황을 경제위기가 아닌 자본주의적 위기로 규정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만이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전망을 생각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역사적으로, 문명사적으로 인식하는 총체적 인식의 틀로 이해하게 된다. 지금의 자본주의 위기는 상업인의 투기, 은행가의 무책임한 행동, 탈세 천국, 신자유주의 탓이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법칙을 이용했을 뿐이며 자본주의 재앙은 자본주의 법칙이다. 그래서 재앙의 극복도 그 법칙을 파괴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법칙으로 가능하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➀역사유물론에 입각 자본주의 역사를 상승기와 쇠퇴기로 크게 구분해야 한다. ➁자본주의 위기극복의 부르주아의 대안은 전쟁과 파시즘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과 사회주의였다. ➂이윤율 저하의 법칙과 시장 포화의 한계법칙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분석 틀이 필요한다. ➃계급투쟁의 역사를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인식해야 한다. ➄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모두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라는 분석틀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➅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을 스스로 건설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혁명당을 건설해서 변증법적으로 결합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위기는 공산주의의 실현으로 탈바꿈된다.

 

자본주의의 과잉생산 경향과 생산에 있어서 무정부체제는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확장, 심화시킬 수 있었는데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상승기는 마감을 하고 전지구가 임노동과 상품의 생산관계로 확장되었다. 총체적 위기가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다 인류의 파멸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➀자본주의는 임금노예도 먹여 살릴 수 없는 체제로 가고 있다.1 ➁인도와 중국의 경제기적은 환상임이 드러났고 현재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경제번영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다. ➂생태적 재앙은 종합적이고 지구적 형태로 구성되어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2부 계급의식, 계급무의식, 혁명

1강 계급의식, 계급 무의식 그리고 혁명

광주 항쟁 이후 맑스주의 이론에 탐구하는 과정에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만남에 주목하고 특히 프로이트의 한계를 넘어서 맑스주의와 변증법적 통합을 시도하고 나름대로 혁명적 실천을 한 빌헬름 라이히를 주목하였다.

 

아직도 맑스주의 내부에서는 ‘청년 맑스’와 ‘장년 맑스’, ‘기계론’과 ‘자율론’ 등등의 허구적이며 피상적 대립이 있다. 이는 맑스에 대한 편향된 독해와 이해에서 비롯되었고 맑스의 저작에서 취사선택한 강조점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맑스주의 올바로 세우기는 총체성을 획득하는 맑스주의 방법론으로 해야 한다. 한가지는 물상화의 이론적 발전을 통한 계급의식 획득과 혁명의 가능성으로,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만남을 통한 계급무의식과 혁명의 가능성으로 살펴본다.

 

맑스의 비판이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관계가 도치되어 사물 관계로 교란되거나 변태적 형식의 가치에 기반한 문명과 생산양식에 대한 것이다. 이런 교란된 형식을 재생산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추상노동이다. 여기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치형식 이론가들은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사회관계 내에서 구체적인 경제, 정치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와 수정을 가져오지만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할 수 없고 패배주의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행동과 노동에 초점을 맞춘 가치형식 이론가, 특히 본펠드는 노동은 자본주의의 변태적 세계의 형식 자체에 맞서며 존재하는 구성하는 힘이다라고 주장한다. 자본은 스스로 자기증식하지않고 집합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노동이 자본관계와 가치형식을 재생산하는 문제는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 안에 갇힌 물상화된 양식을 흔드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가치증식 뿐만 아니라 실질적 부의 생산을 위해서 인간의 실천, 집합 노동자의 실천적 요소를 바라보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의식과 물신성의 틀 속에서만 인식하고 혁명의 실천적 가능성을 구체화시키는 데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의 산물이며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더 깊은 구조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객체이면서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계급무의식의 문제이며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만남의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

 

맑스주의와 심리학의 만남은 부르주아 심리학이 개인에 기반하여 역사와 계급의 구조적 맥락과 분리되고 개인의 합이 사회라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함정에 빠져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봉사한다는 비판적 문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맑스주의자가 인간 의식과 삶이 무의식적 동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아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며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이전의 모든 사회의식을 구성하고 있음도 자연스런 일이다. 바로 이런한 무의식의 문제를 유물론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정신분석학이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의 실질적인 수렴은 인간심리(정신)가 자연의 실질노동의 산물이며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그보다 선행하고 그를 결정하는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즉, 무의식의 지배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중심적 계획이 된다.

 

특히 라이히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가능성은 혁명의 주체인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에 대한 철저하고 폭넓은 이해에 기반한 혁명지도부의 계급의식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①모든 영역에서 고유한 삶 욕구들에 관한 인식 ②그 욕구들을 만족시킬 방법들과 가능성에 대한 인식 ③사회경제적 사회질서가 그 욕구만족을 방해하는 장애꾼들에 관한 인식 ④자신의 삶의 필수품들과 그것의 방해물에 대해 단절하려는 데 대한 자신의 금지와 불안에 관한 인식 ⑤대중의 통일이 이루어질 때 억압자의 권력에 대항해 불굴의 힘을 만들어낸다는 인식이다. 반면 혁명지도부의 계급의식은 대중이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대중을 대신해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자본의 멍에로부터의 혁명적 해방은 혁명지도부가 삶의 모든 측면에서 대중을 이해하기만 하면 충분히 발전된 대중의 계급의식에서 자발적으로 성장할 총괄적 행동이다.

 

2강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계급무의식의 대립구조

라이히는 계급의식의 구체적 요소를 청소년, 여성, 성인 남성 노동자, 어린이의 특성에 따라 구분하는 시도를 한다. 청소년의 경우 권위주의적 억압, 국가 권위의 집행인들의 부모에 대한 반항을 정치적 좌익의 흐름으로 보고 스포츠에 대한 열광, 군복을 입은 남성과 행진곡을 좋아하는 것은 반혁명적 요소로 본다. 여성의 경우는 경제적 독립, 남성으로부터 독립, 성적 독립을 중요한 계급의식의 요소라고 본다. 성인 남성 노동자의 경우에는 집합적 산업노동이 계급 감정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지 노동자라는 것과 노동조합원이라는 사실이 계급의식을 높인다고 보지 않는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평등, 공장과 민족의 통일이라는 산업평화론을 노동자들이 흡수한다면 오히려 파시스트로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관념의 힘이 물질적 빈곤의 힘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어린이의 경우에 영양부족, 배고픔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 못하며 오히려 질투, 비굴함과 절제를 가져와 혁명적 감정의 발전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이 중요한 과제라고 한다.

 

사회주의 운동 지도부의 과제는 대중을 계급의식 있는 투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적 과정을 연구하는 것과 더블어 혁명적 본능을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 농민 속에서 발전시키는데 있다.따라서 부르주아 과학이 어디서 실패했고 왜 실패했는지, 부르주아 세계관이 어디서, 어떻게 지식의 장애물인가를 사실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가 반동이라고 폭로하는 것보다 어디에서 천재적인 자연과학자인지 어디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부르주아 철학자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하면 진지하고 유용한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라이히의 성 정치 운동은 주관적 욕구로부터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대중의 욕구를 과연 만족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 하는 모든 정치적 쟁점을 밝힘으로써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그는 강령적 요구도 ‘우리는 대자본을 흡수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우리의 올바른 관리 아래 두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전자의 요구는 정치적으로 왜곡된 노동자들에게는 마치 자신이 남의 소유를 장악한 것처럼 범죄의식과 어떤 금기를 지닌 채 반응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노동에 근거한 자신의 정당한 소유권을 의식하게 되어 사유재산 불가침성이라는 부르주아 관념이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방어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이다.

 

-파시즘에 대한 라이히의 문제의식

‘파시즘의 대중심리’ 증보개정 3판에서 라이히는 사회적 조건과 변동이 인간의 원천인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켜 그것을 성격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그 성격 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구조를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파시즘은 인민 대중들에 의해 탄생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대중들 개인의 성격 구조에 존재하는 모든 특성과 모순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반역적 정서와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통속적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즉, 경제적 상황과 대중들의 심적 구조의 불일치, 심리구조와 심리주고가 표출된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이해해야 하는 문제는 배고프고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왜 파업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심리학이라는 이유로 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있으며 주체적 요인의 취급을 정치적 반동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에게, 정신과 영혼만이 유일하게 역사적 진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층 중간계급의 경제적 생존 양식과 이데올로기적 신비주의가 결합해서 정치적 반동의 근거지가 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신의 개념, 원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들 속에 깊이 고착되는지, 언제 이러한 종교의 개념들이 인간 속에 깊이 고착되는지,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에너지가 사용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자면 파시즘은 권위주의적 기계 문명 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정서적인 태도이며 기계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생활 개념으로써 반역적 감정과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며 보편적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반응의 총체이다. 인간의 원시적인 물질적 욕구의 억압은 반역을 유발하는 반면, 성의 억압은 도덕적 방어로 닻을 내리게 하여 무의식적으로 모순, 억압에 대항하는 혁명을 제지하는 반동적 힘을 갖게 한다. 또한 성억압은 정치적 반동으로 이끌고 대중을 피동적이고 반정치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의 성격구조에 권위주의적 질서를 지지하게 하는 가상적 이해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런 관점에서 대중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능력상실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의 성의 억압에 있다는 것이다.

 

라이히가 파시즘의 비합리성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중정치운동 대신 성정치의 실천을 함으로써 깊은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계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구조에 대한 깊은 인식, 그것의 억압으로 나타난 대중심리구조의 반역적이고 반동적인 구조, 다시 이와 엇물리는 사회, 경제, 정치구조와 이념의 역동적 체계를 총체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했다.

  1. 세계적으로 매일 굶주림으로 10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10세 미만 어린이는 매 5초마다 죽고 8억 4천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다. [본문으로]